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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26일 19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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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어윤대(전 고려대 총장)가 보내준 e메일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어디에 있더라…."
앨리스 앰즈던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정치경제학)는 기자가 보스턴의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한국 관련정보를 찾느라 부산했다. 앰즈던 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한국경제를 연구해온 미국의 주요 지한파 학자.
그는 최근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주요 경제 신흥국가를 분석한 두툼한 연구서 집필을 마쳤다. 내년 초 선보일 이 책은 '아시아의 다음 거인(Asian's Next Giant)'과 '후발 국가들의 부흥(The Rise of the Rest)'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주요 저서다. 30년 가까운 연구과정에서 초기 신흥국가로 분류된 몇 개국이 탈락했지만 한국은 한 번도 그의 연구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2007년 한국경제의 새 출발을 코앞에 두고 그를 만났다. 앰즈던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향한 나의 믿음은 27년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며 "한국 사람들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발전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후발 국가들의 부흥'에서 재벌기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재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당신의 시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나?
"그렇다. 1979년 한국의 철강, 조선업체 등 30개 주요기업을 찾아다니며 성장요인을 분석했던 적이 있다. 세계은행(IBRD)의 신흥국가 경제개발 분석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였다. 근로자들을 '고문'하다시피 쫓아다니면서 연구할 당시 한국 기업의 열정과 투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은 지금도 세계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한 질 높은 교육 콘텐츠를 보유한 중요한 핵심 주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초기 재벌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과정은 대기업에 대한 국민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느 나라든지 가족 기업의 규모가 거대해지고 역사가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는 가족구성원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형제간 혹은 며느리와 시부모, 아들과 아버지가 경영권과 재산을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두 번째는 모두가 그 기업을 싫어하게 된다는 것. 사랑받기에는 너무 덩치가 커지는 셈이다. 따라서 이 시점의 재벌 규제와 개혁은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진정 그 기업과 한국경제를 위한 재벌개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외국의 규제를 베끼는 차원에서 적용하는 사례는 지양해야 한다."
-한국의 재벌개혁이 외국의 기준에 치우쳐 있다는 의미인가.
"그런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외국기업들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준 것은 한국보다 외국투자자들을 위한 조치였다고 본다. 한국인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만들어놓은 과실들을 외국인들이 우악스럽게 먹어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 금융시장 개방? 그런 논리만 고집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독단적이다.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외국 투자자들에게만 좋은 주장이다.
-최근 재벌 2, 3세들의 후계구도가 가시화되고 있다. 경영권 승계 작업이 본격화되는 추세를 어떻게 보는지?
"과거의 경영권 승계와는 다를 것으로 본다. 이제는 기업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지켜보는 눈들도 많다. 경영권을 갖게 되더라도 2, 3세가 능력 발휘를 못하면 밀려날 수밖에 없다. 물론 일정 지분을 가지고 주주로서 힘을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어차피 경영자의 잘못으로 기업이 휘청거리면 주식의 가치도 급격히 떨어진다.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한국 정부의 재벌개혁 방향이 경제 침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가?
"한국경제는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 이후에 어려워진 부분이 있다. 한국에는 고성장을 위해 한국에 맞는 방식들이 있었는데 이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글로벌 기업들의 기준에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금융시장 문을 모두 열어야 했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의 실체는 정확치 않다. 그냥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앰즈던 교수가 최근 완성한 저서의 가제는 '제국으로부터의 탈출(The Escape from the Empire)'. 여기에는 칠레나 인도네시아, 인도 등의 분석을 바탕으로 신흥 경제국가들이 경제 강대국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들의 성장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은 어떤가? 미국은 한국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한국이 너무 폐쇄적이라고 노골적인 비판을 터뜨리고 있는데.
"이웃나라 일본으로 눈을 돌려보라. 미국이 시장 문을 열라고 수없이 압력을 행사했지만 버텼다. 자국의 이익이 놓인 글로벌 협상에는 전략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개방 자체가 가진 장점이 많지만 개방의 조건이 문제다. 미국의 요구대로 끌려가기 전에 잘 따져보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최근의 침체된 한국경제를 보면 당신의 낙관적 예측이 틀렸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은 이제 'Next Giant'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20년 전에도 그랬다. 한국인들은 잘 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불안해하고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두려움과 비관론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돼 있다. 다만 최근에 북핵 문제로 외교 분야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점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각종 수치를 보면 다른 동남아 국가나 다른 신흥 개발국에 비해 한국의 성장률이 떨어진다.
"그것은 각국의 발전단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막 고성장 단계에 진입한 국가와 그 단계를 넘어선 국가의 성장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이 직면한 이 고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성장률 0.1%를 올리기 힘들고 기술적인 혁신과 프론티어 정신이 없으면 넘기 어렵다.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모두가 생각하듯이 중국의 추격을 위협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북한 핵문제는 장기적으로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모건 스탠리는 외국인 투자자의 기피현상으로 내년에 10조 원대의 '셀 코리아' 현상을 전망하기도 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들어 보이며) 북한이 터뜨렸다는 핵무기는 이 차 안의 티백 같은 수준이었다. 규모도 작았고 파괴력도 크지 않았다. 내년 한국경제에도 큰 영향은 못 미칠 것으로 본다. 나는 오히려 틈만 나면 북핵 문제를 핑계 삼아 돈을 빼가려는 외국자본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한국에 실제 위험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 해가 된다는 차원에서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이 함부로 돈을 못 빼내가도록 벌칙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웃음)"
1시간 반의 인터뷰가 끝날 때쯤 앰즈던 교수는 "MIT에 한국연구소를 세우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며 이를 성사시킬 방안을 물었다. 한때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지원을 약속했던 대우그룹이 무너진 뒤 지금은 무기한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그는 "연구소 이름을 '김(KIM)', 그러니까 'Korea Institute of MIT'이라고 하면 멋질 것 같지 않느냐"며 의욕이 남아있음을 언뜻 내비쳤다.
▼앰즈던교수는
1970년대 말부터 한국 등 신흥국가들의 경제발전 과정과 동인을 연구해온 여성학자다. 코넬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개발경제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땄다. MIT 도시정책학과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은행과 OECD, 유엔 산하의 각종 기구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의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내놓은 '후발공업국의 부흥' 같은 저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유럽의 후발국가에서 주요 '지침서'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다룬 '아시아의 다음 거인'은 92년 미국정치학회에서 최우수 저서로 선정됐다. 그는 당시 연구과정에서 'ATKE(American-Trained Korean Economy)'라는 말로 한국의 경제개발과정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역할을 분석했다.
보스턴=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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