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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8월 1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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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장정에 따라 나서지도 못할 뻔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신화(新華)통신은 9일 “이는 1980년대 초반 사학계에서 공인되고 일반에도 공개된 사안”이라고 전했다.
장시(江西) 성 간저우 시 당사편찬실 링부지(凌步機) 부주임은 “이는 1984년 우슈취안(伍修權)이 펴낸 ‘나의 역정’과 1993년 발간된 ‘캉커칭(康克淸) 회고록’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우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오스트리아 출신 군사고문 리더(李德)의 통역으로 대장정에 참여한 뒤 나중에 외교부 부부장까지 오른 인물이고, 캉커칭은 훗날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된 주더(朱德)의 부인이다.
우는 저서에서 “당초 ‘그들’은 마오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며 “마오는 당시 중앙영도의 핵심에서 밀려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들’이란 리더와 당시 공산당 총서기이자 홍군의 야전사령부 정치위원이었던 보구(博古)를 지칭한다. 보구는 나중에 스스로 과오를 비판했다.
공산당사 전문가들은 “1934년 9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가 대장정 참여자를 결정할 때 ‘우경(右傾)’으로 분류한 인물은 제외했다”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 주석이자 중앙홍군의 주요 창건자로 신망이 높았던 마오를 장정에서 빼는 대신 장시 성 위두(于都) 현으로 보내 조사연구 업무를 맡기려 했다”고 설명했다.
마오의 경호요원이었던 우지칭(吳吉淸)도 1983년 출간한 저서 ‘마오 주석 곁에서의 삶’을 통해 “대장정 출발 때 중앙부대의 명단에 마오의 이름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마오는 당시 주석이었지만 실제로는 ‘부농(富農)노선’이나 ‘협애한 경험론’을 버리지 못한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받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우가 줄기차게 지도부를 설득해 장정 출발 전날 밤에서야 겨우 동참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
링 부주임은 “마오를 대장정에 참여시킬 것인지는 마오뿐 아니라 당과 홍군, 중국혁명의 명운과도 직결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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