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인문사회]현대 일본의 정신적 혼란 진단

  • 입력 2004년 2월 27일 17시 30분


코멘트
◇현대일본사상론:역사의식과 이데올로기/야스마루 요시오 지음/이와나미 서점

역사가가 현대의 사상사를 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 역사가는 여러 자료를 발굴하고 독해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과거의 사실이 갖는 의미란 그 사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뒤에 흐르는 시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사소한 사건처럼 보였던 사실도 그 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현재라는 시간을 이해하고 논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감쌀 수 있는 역사 전체상의 인식과 미래를 투시하는 눈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런 작업은 역사가의 역사관이 철저하게 시험당할 뿐 아니라 역사가로서의 능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같은 작업에 도전한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의 민중사상사를 개척한 일본 역사학계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일본의 근대화와 민중사상’, ‘신(神)들의 유신’, ‘근대 천황사의 형성’ 등 그의 저서는 일본 국내에서도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북미의 일본 연구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현대 일본의 사상 상황’, ‘전후 사상사 속의 민중과 대중’, ‘천황제 비판의 전개’, ‘표상과 의미의 역사학’, ‘마루야마(丸山) 사상사학과 사유양식론’, ‘20세기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 6장으로 구성돼 있다.

장마다 독립된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시종일관하고 있는 것은 현대 일본의 사상 상황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눈길이다. 저자는 1945년 패전 이후 사상사의 흐름을 조감하면서 1970년대 중반을 사상의 크나큰 분기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주의라는 커다란 두 사상의 참조 틀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의 영향으로 시대를 통괄할 수 있는 사상 축을 잃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은 이른바 ‘석유 위기’ 이후 그때까지 일본 사회에 범람하고 있던 ‘고도성장’의 신화가 무너졌고,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약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역사를 재단(裁斷)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로서 객관적 눈으로 사상사의 흐름을 분석한다. 그런 한편 구체적인 개개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적 전체성의 지향이 엷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역사의 전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현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매우 어렵게 되며 애매모호하고 엉거주춤한 현상긍정만이 생길 뿐이라는 그의 분석은 예리하다.

저자는 오늘날 일본의 사상적 혼미 상황이 이 같은 전체성에 대한 눈길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마주하면서 살아가려 한다면, 이 세계 전체성을 민중의 생활을 통해 표상하려는 노력을 중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저자의 말 속에서 그가 역사가로서 얼마나 성실한지와 함께, 생활인으로서의 ‘민중’을 결코 잊지 않고 있는 민중사상사가로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연숙 히토쓰바시대 교수·언어학 ys.lee@srv.cc.hit-u.ac.jp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