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제균/독재자 단죄의 명암

  • 입력 2004년 2월 11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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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년 전인 2002년 2월 12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치된 구(舊)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62)의 재판이 시작됐다. 밀로셰비치는 1990년대 20만명이 숨지고 3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발칸전쟁의 전범. ‘대(大)세르비아주의’를 앞세우며 연방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 혐의도 받았다.

▷재판은 오는 19일에야 비로소 검찰측 논고가 이루어질 정도로 질질 끌고 있다. 밀로셰비치가 현란한 언변과 지연 전술로 법정을 농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에서 “나는 광란의 국수주의를 타파하려 했으나 서방측의 분열책동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진정한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알바니아계를 탄압한 이유는 “오사마 빈 라덴이 알바니아를 방문했고, 알바니아계가 많은 코소보에 알 카에다 대원을 파견한 증거가 있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자신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보다 먼저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는 것.

▷그는 재판 실황이 30분 시차로 세르비아에 생중계된다는 점을 악용해 교묘하게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불을 지르고 있다. “변호사도 없이 단신 출석한 밀로셰비치가 검찰측 증인을 논박할 때마다 세르비아에서는 찬사가 터져 나온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그가 재판에서 ‘서방측 꼭두각시’로 몰아붙인 조란 진지치 전 총리는 밀로셰비치 추종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세르비아 총선에서는 극우파가 득세했으며, 밀로셰비치는 옥중 당선되기까지 했다.

▷독재자는 축출뿐 아니라 뒤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머지않아 시작될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재판에서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프랑스 최대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2000년 신년호에서 세계 6대 독재자를 선정하고 이들이 21세기를 맞아 국제재판을 받는다는 가상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후세인은 독재자 3위, 밀로셰비치는 5위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둘 다 건재했으니 가상 기사가 현실이 된 셈. 그 기사에서 이들보다 앞선 2위로 재판을 받은 독재자는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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