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정상회담 이후]한일 전문가 도쿄현지 긴급대담

  • 입력 2002년 9월 18일 18시 47분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으로 북-일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한편 과거사 청산, 핵 미사일 등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측 주장을 파격적으로 받아들여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양국의 이해득실, 앞으로의 전망 등을 북한문제 전문가인 이즈미 하지메(伊豆見元) 시즈오카현립대 교수와 국제정치학자인 이종원(李鍾元) 릿쿄대 교수로부터 들어봤다. 좌담은 정상회담 당일인 17일 심야에 동아일보 도쿄지사에서 진행됐으며 김충식(金忠植) 지사장이 사회를 맡았다.》

▼배경과 평가▼

▽김충식 지사장〓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전면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인상적이다. 북한의 의도나 계산 등을 포함해서 이번 정상회담을 평가한다면….

▽이즈미 하지메 교수〓북한의 태도변화에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으로부터의 압력을 강하게 느꼈음이 틀림없다. 다음은 경제문제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유럽연합(EU) 등과의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지만 경제적으로 별로 얻은 게 없다. 결국 남은 곳은 일본뿐이다. 이 밖에 일본 내 조선총련계 조은(朝銀)신용조합들이 파산해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하게 됐다. 조은이 망하면 북한 정권까지 흔들린다.

▽김〓북한이 스스로 테러 국가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이즈미〓북한이 2년 전 북-일관계 개선에 성의를 보였다면 새로운 전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이다. 적극적인 의미는 없다.

▽이종원 교수〓난 의견이 좀 다르다. 이번 변화는 북한이 최악의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으며 본격 회복을 위해 경제지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20여년 전 있었던 국가테러를 인정했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일이다. 나는 북한이 부분적, 단계적으로 피랍 일본인 정보를 공개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말 놀랐다. 여러 위험과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테러국 이미지를 털겠다는 의지로 평가된다.

▽이즈미〓북한이 한국인 납치문제도 청산한다면 역시 새로운 역사, 변화라고 인정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한국과는 아직도 휴전상태에 있고 한국도 인권문제 등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다. 한국인 납치문제는 결국은 남북이 풀어야 할 숙제다. 북한의 결단은 짧게 보면 북-일관계 타결을 위한 것이지만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북-일간 득실▼

▽김〓고이즈미 방북의 성과를 어떻게 보는가.

▽이즈미〓전반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납치문제뿐 아니라 평양선언에서 여러 현안을 해결할 수 있도록 조정됐다. 특히 안보문제에서 북-일간 안보협의의 틀을 만든 것은 대단한 성과다.

▽이〓2년 전 남북정상회담이나 94년 북-미합의와 비교하면 북한이 이렇게 양보한 것은 큰 변화다. 평양선언 전체가 실무적 표현이고 기존의 역사의식 등 감정적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핵문제도 지역논의의 틀을 마련했다. 일본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이 북한을 둘러싼 불리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 얻은 외교적 성과다.

▽김〓그렇다면 북한은 손해인가.

▽이〓명분을 포기한 대신 실리를 얻었다. 철저한 실리주의 외교였다. 일본 내 반발이 크지만 예상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경협자금이 들어온다면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이득이다.

▽이즈미〓그러나 이번 양보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계속 획기적으로 양보해야 할 상황에 몰리게 됐다. 이게 고이즈미 총리가 노리는 바다.

▽이〓역사청산이 제대로 안됐다는 점은 한반도의 불행이다. 한일협정 때도, 이번 북-일회담에서도 일본으로서는 상대가 독재정권이고 경제적 궁핍이 심각하다는 상황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했고 또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번 방북에서는 일본인 납치문제가 있어 더욱 그랬다. 일본 총리로서 첫 북한 방문인데 관계 회복이나 역사청산은 뒷전에 있고 피랍 일본인을 구하러 가는 전사와 같은 표정이었다. 일본 국민의 역사인식은 더욱 희미해지고 있다.

▽김〓북한이 여러 차례의 교섭에서 과거사 배상을 고집하다가 결국 한일 경협방식을 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즈미〓일본은 오래전부터 한일방식밖에 없다고 주장해 왔다. 11차례 수교교섭 본회담이 이어지면서 북한으로서도 어느 정도 각오했다고 본다.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싶은 의욕이 있다면 입장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김〓북-일관계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는데 이번 회담을 보면 오히려 가장 쉬웠다.

▽이〓한일협정 체결 때 한국이 과거청산을 포기했고 중일수교 때 중국도 실리만을 취했다. 이제 와서 북한만 다른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정세 변화▼

▽김〓동북아 정세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핵 관련 합의나 미사일 동결 방침을 어떻게 보는가.

▽이즈미〓동북아 평화 안정에 정말 도움이 될 정도로 흘러갈지는 두고봐야 한다. 북한은 여러 약속을 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모두 성과를 거뒀을 때야 비로소 긴장완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평양선언에서 안보 관련 국제협력 틀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은 현실적이고도 타당한 방안이다. 핵이나 미사일문제는 남북, 북-미, 북-일 등 각국에 따라 이해나 관심이 엇갈린다. 또 북한이 느끼는 안보위협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지역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관련국가들이 참가하는 협력틀을 마련하는 것은 안보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데 유효하다.

▽김〓미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나.

▽이즈미〓대북(對北) 강경기조는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실험발사 동결을 약속했지만 핵사찰을 수용할지 등도 지켜볼 것이다. 북한이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변화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북한으로서는 미국에 대해 새로운 신호를 보낸 것 아니냐.

▽이즈미〓그러나 미국은 실질적인 것을 원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뀌려면 쌍방간의 위협을 줄이자는 약속이 있어야 하는데 부시 정권이 이번 회담을 계기로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앞으로 북-일관계가 진전되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미국의 입장은 사실 관계가 아직 명확하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일본은 대북정책에서 미국에 대해 두 가지 불안을 갖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미국이 너무 앞서가면서 틀만 만들고 일본은 돈만 내는 것 아니냐는 본능적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또 부시 정권 이후 강경파들이 현실적 착지점 없이 세계전략 측면에서 지역틀을 흔들어버리면서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미국은 북한을 거칠게 다루고 있지만 일본은 미국과 입장이 다르다. 한국도 미국의 강경책에 반발하면서 올 들어 미국의 톤이 다소 누그러지고 있는 느낌이다.

▼수교교섭 등 전망▼

▽김〓국교정상화 교섭은 각론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또 북-일 정상회담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이즈미〓수교교섭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안보문제에서 북한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이다. 일본은 이 부분에 힘을 쏟으며 북한을 변화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일본이 경제협력 협의에 진지한 성의를 보여야 북한을 안보협의의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다. 양보하면 뭔가 얻는 게 있다는 것을 북한이 믿게 해야 한다.

▽이〓고이즈미 총리는 수교교섭 재개를 내세워 납치문제의 전면 해결을 요구했을 것이다. 북한도 단기타결을 기대하고 모든 카드를 던졌다. 그러나 수교교섭이 예상외로 장기화되면 북-일관계가 다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선 일본 여론이 납치문제로 크게 자극받았기 때문에 수교교섭 재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면 고이즈미 총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김〓대북여론이 악화되더라도 고이즈미 총리 개인의 지지율은 높아질 수도 있지 않은가.

▽이즈미〓조금 올라갈 수도 있지만 수교 교섭이 원만히 진행될지 잘 모르겠다.

▽이〓북-일수교만을 단독으로 선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남북, 북-미, 북-일간의 교섭을 동시에 진전시키면서 관계를 개선해 나갈 것으로 본다. 문제는 미국이다. 제임스 켈리 특사가 방북한 다음 북-미관계가 어떻게 달라질지 주목된다.

▽이즈미〓아쉽게도 일본에는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열의가 없다. 현재의 여론 악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21세기 들어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대체로 필요성이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판단된다. 고이즈미 총리도 전후처리나 국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보다는 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보 등의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김〓남은 과제를 지적한다면….

▽이〓일본은 외교적, 전략적 이해와 대중적 관심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다. 전략적으로는 아시아 내 존재감을 중시하고 있지만 대중의 감각은 그 반대다. 게다가 정치적 결집력이 약해 정책이 있어도 실천력이 부족하다. 특히 한반도나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특정집단의 이해나 감정적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일본의 숙제다. 북한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변화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회=김충식 본보 도쿄지사장

대담자 = 이즈미 하지메 교수

△1950년 도쿄 출생

△주오대 법학부 졸업. 조치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론 전공

△연세대 대학원 연구과정 수료

△평화안전보장연구소 주임연구원 역임

△시즈오카현립대 국제관계학 부 교수

△하버드대 객원연구원 역임

△저서에 ‘기로에 선 북조선’ ‘전후 일본의 외교정책’ 등

이종원교수

△1953년 대구 출생

△서울대 공과대 중퇴

△1982년 도일, 국제기독교대, 도쿄대 국제정치학 박사

△도호쿠대 법학부 조교수 거쳐

1996년부터 릿쿄대 법학부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 객원교수 역임

△아사히신문 아시아네트워크 객원연구원

△저서 ‘동아시아 냉전과 한미일 관계’로 99년 아시아인으로 처 음 미국역사가협의회 최우수 외국어저작상 수상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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