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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월 7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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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탄은 하나만 던졌다〓일본 경찰은 이 의사가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는 것을 발견하고 주변에 있던 5명의 경찰관이 달려들어 제압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경찰관은 나중에 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 의사는 거사 사흘 후인 1932년 1월11일 제2차 예심에서 “처음 던진 폭탄 소리에 놀라 왼쪽 주머니에 있던 폭탄을 던지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또 “조선 민족은 일본의 통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으므로 두 번째 폭탄은 던질 필요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김구(金九) 선생의 ‘백범일지’도 ‘한 개의 폭탄은 자폭용으로 준비했다’고 밝혀 이 의사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 두 번째 폭탄은 실제로 이 의사가 경시청으로 연행된 뒤 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격투 끝에 이 의사를 체포한 것처럼 발표한 것은 실추된 일본 경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거사 전날 밤의 행적〓이 의사는 거사 전날 밤인 1월7일 도쿄(東京)에서 가까운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의 다마키로(玉木樓)라는 유곽에 머문다. 지금까지는 “이 의사가 긴장을 달래기 위해 유곽에 머물며 폭음을 했다”는 설이 많았다.
그러나 이 의사는 유곽의 여인은 그대로 둔 채 밤 12시에 이웃 술집으로 갔는데 그때 과자를 파는 소녀가 들어왔다. 이 의사가 소녀에게 고향을 묻자 소녀는 “아버지가 조선의 인천에서 왔다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의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쯤은 알아야 한다”고 꾸짖은 뒤 유곽에 머무는 돈의 반이나 되는 큰돈을 쥐어주며 “공부 열심히 하고 조국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오전 1시반경 다마키로로 돌아갔다. 이런 사실은 술집 주인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다마키로로 돌아온 이 의사는 “아침 여섯시에 깨워 달라. 그러나 비가 오면 깨우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는 비가 올 경우 야외 행사인 천황의 관병식이 취소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사과정에서 이 의사가 가와사키를 숙박지로 정한 이유도 드러났다. 천황의 야외 행사를 앞두고 도쿄시내에서는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행해지지만 가와사키는 도쿄에 붙어 있으면서도 행정구역이 달라 예비검속이 심하지 않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 의사가 상당히 치밀하게 거사준비를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위의 호의적인 평가〓예비심문 때 취조관은 증인심문을 통해 이 의사의 인격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증인으로 불려온 58명의 대부분이 이 의사를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특히 이 의사의 애인으로 도쿄 긴자(銀座)에 있던 시로기야(白木屋)백화점의 여직원 자모토 기미요(座木幾美代·23)는 “(이 의사의) 일본어가 너무 능숙해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며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으로 품위 있는 교제를 했다”고 강조했다. 이 의사는 자모토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편지를 보낼 때는 항상 심부름꾼을 통해 직접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의사는 그 이유를 “우편으로 보내면 기숙사 사감이 먼저 읽어보기 때문에 자모토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김구 선생과의 관계〓이 의사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김구 선생과의 관계를 끝까지 부인했다는 사실은 1994년 12월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 의사는 “백정선(白貞善·김구 선생의 가명)은 알지만 김구는 모른다”고 버텨 김구 선생을 주범으로 기소하려던 일본 경찰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이번에 입수한 자료에는 김구 선생이 거사 나흘 전인 1월4일 도쿄의 이 의사에게 추가자금으로 100원(元)을 송금하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보낸 전보도 들어 있다. 전보에는 ‘세이킨(正金)에 100 보냈다. 하쿠’라고 적혀 있다. 세이킨은 ‘세이킨은행’을 뜻하며 ‘하쿠’는 ‘白貞善’의 ‘白’의 일본식 발음. 이로 인해 이 의사는 돈을 보낸 사람이 김구 선생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