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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0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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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긴축정책으로 인해 올해 월급이 15% 이상 깎인 아르헨티나 국민은 지난달부터 은행에서 마음대로 예금도 인출할 수 없게 되면서 불만이 극에 달했다. 기업활동 부진으로 인해 실업률이 35%까지 치솟으면서 3600만 전체 인구 중 40%가 넘는 1500만명 가량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13일에는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 취임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벌어졌다.
19일 대규모 소요사태는 13일 총파업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델라루아 대통령의 출신 지역인 코르도바주에서는 시민들이 주정부 청사로 난입해 일부 사무실에 불을 지르거나 집기를 밖으로 내던지고 점거 농성을 벌였다. 가장 큰 소요가 발생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시민들이 상점에서 생필품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우리에겐 직업도 없고,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살만한 돈이 없다”고 외쳤다.
소요사태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증시는 큰 폭으로 상승하는 이변을 보였다. 페소화 평가절하에 대한 기대감과 은행을 빠져나온 자금들이 주식시장으로 몰리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증시의 메르발지수는 19일 전날보다 무려 7.6% 급등한 272.76에 마감됐다.
<정미경기자>mickey@donga.com
▲[아르헨 경제난 원인]수출부진에 IMF 지원거부 '설상가상'▲
폭동사태로 번진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1989년의 악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5000%를 웃도는 인플레를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90년대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 아래 긴축재정을 실시하고 페소화를 달러화에 1대 1로 고정시키는 ‘페그’제를 도입하면서 인플레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페그제로 인한 수출 부진과 90년대말 아시아 러시아 등지를 휩쓴 경제위기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최근 3, 4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다.
400억달러 구제금융을 약속한 IMF가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지난달 지원분인 13억달러의 제공을 거부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위기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아르헨티나는 IMF의 요구에 맞춰 내년 예산을 490억달러에서 390억달러로 축소 편성했으나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가 이를 통과시킬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부에서는 IMF가 차관 공여를 거부하면서 간접적으로 아르헨티나에 페소화를 평가절하하도록 압력을 넣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페소화의 가치를 떨어뜨릴 경우 장기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수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아르헨티나는 132억달러 채무의 대부분이 달러이기 때문에 채무상환액이 그만큼 늘어나게 돼 선뜻 평가절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사태가 90년대말 아시아 경제위기만큼 국제적 파급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같은 신흥국가들이 90년대말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금융 시스템을 대폭 보강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줄였기 때문이다.
<정미경기자>mickey@donga.com
▲[카발로 경제장관 사임]'경제기적 주인공' 경기침체에 좌초▲
한때 경제위기 극복의 영웅이었던 도밍고 카발로 아르헨티나 경제장관(사진)이 결국 경기악화의 높은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19일 사임한 카발로 장관은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자유시장주의자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인 91∼96년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열광적인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91년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화 가치를 미국 달러화에 1 대 1로 고정시킨 ‘페그’제로 연평균 5000%에 이르던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는 기적을 일구어냈기 때문.
그는 96년 초긴축 재정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과 이에 동조한 메넴 전 대통령과의 의견 차이로 사임했어도 에콰도르와 러시아가 경제 고문으로 서로 모셔가려 했을 정도로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다.
그러나 98년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축되면서 1 대 1 태환제는 경제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아르헨티나 상품의 수출단가가 올라가고 물가도 상승하는 바람에 무역적자는 쌓이고 투자자와 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
올해 3월 다시 경제위기 해결사로 기용된 카발로 장관 본인도 “초인플레를 잡는 일이야말로 정말 쉬운 작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태환제 하나만으로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
하지만 대안을 찾지 못해 8개월 동안 표류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에 떼밀려 92억달러의 재정지출 삭감안을 내놓았다. 결국 국민의 반발만 초래한 채 자신의 직을 내놓아야 했다.
<선대인기자>eodl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