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대선 TV토론]부시 외교지식 해박…고어 눌렀다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8시 30분


조지 W 부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간의 미국 대통령 후보 2차 TV토론회는 부시 후보의 ‘한판승’으로 끝났다. 이웃집 아저씨같이 어눌하면서 수더분한 이미지의 부시 후보가 말은 잘하지만 딱딱한 표정의 모범생 같은 고어 후보를 누른 것.

토론이 끝난 직후 CNN방송이 USA투데이 및 갤럽과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9%가 부시 후보가 잘했다고 답변해 36%를 얻은 고어 후보를 크게 앞서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여론조사에서 다시 고어 후보를 제친 부시 후보 진영을 크게 고무시켰다.

미국 대통령 선거일(11월7일)을 4주 남짓 남겨둔 11일 오후 9시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 세일럼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열린 2차 TV토론회에서 사회자로 나선 미국 PBS방송의 앵커 짐 레러는 토론 시간 90분간의 절반을 외교 해외파견 등 국제분야에 할애했다.

고어 캠프측은 국제분야만큼은 8년 가까이 미국의 부통령을 지내며 각종 정책 결정과정에서 깊숙이 관여한 고어 후보의 낙승(樂勝)을 예상했다. 선거전문가들도 최소한 외교분야에서는 고어 후보의 우세를 점쳐왔다. 두 차례의 부통령직 연임을 포함해 워싱턴의 중앙정치무대 경력만 24년에 이르는 고어 후보에 비해 부시 후보는 텍사스 주지사를 연임한 것 외에는 워싱턴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 그러나 막상 사회자의 질문이 계속 이어지면서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외교정책에 문외한으로 평가받던 부시 후보는 중동 유고 소말리아 코소보 등 최근 발생한 국제분쟁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나름대로 유창한 언변을 선보였다.

아이티 문제와 관련해 부시 후보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미군을 보낸 아이티 개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며 “아이티와 같은 ‘국가건립’을 목적으로 하는 미군 파견을 반대한다”며 또박또박 자신의 소신을 펼쳤다.

그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실각으로 이어진 클린턴 행정부의 발칸반도 개입 노력을 치하(?)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고어 후보의 실책은 대외정책에 대한 자신의 강점을 뚜렷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것. 고어 후보와 부시 후보는 중동평화협상 유고 코소보 등 대부분의 대외정책에 관해 ‘동의한다’ ‘이견이 없다’는 등의 표현을 연발했다. 사회자가 ‘당신들의 차이점을 말해달라’고 채근했을 정도.

이는 결국 유권자들에게 ‘부시도 고어 못지않은 외교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준화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라고 분석가들은 지적한다.

CNN의 여론조사에서도 부시 후보가 미국의 훌륭한 대통령이 될 만큼 지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0%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그렇지 않다’고 답변한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부시 후보로서는 2차토론에서 크게 성공한 셈.

이 방송 인터넷판 여론조사 결과도 부시 후보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어느 후보에게 신뢰가 가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0%(1만2133명)가 ‘부시’라고 답한 반면 ‘고어’를 지지한 응답자는 20%(3106명)에 그쳤다. ‘어느 후보가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더 나은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도 부시 후보가 71%(1만5955명), 고어 후보가 29%(6400명)를 얻었다.

1차 때와는 다른 2차토론 분위기도 부시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후보들을 연단에 세우고 다소 딱딱하게 진행된 1차토론과 달리 2차토론은 후보들이 사회자와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듯이 토론을 했다. 자로 잰 듯한 답변을 하는 경직된 고어 후보보다는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부시 후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여건이었던 셈.

부시 후보는 “고어 후보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사실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고 공격해 고어 후보의 사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분석가들은 부시 후보가 이처럼 1차에 이어 2차토론에서도 유권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음으로써 일단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지만 변수는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날 토론이 총기규제 의료보험 등 국내문제로 넘어갔을 때 고어 후보는 외교분야에서의 실점을 만회하려는 듯 “부시 후보는 정유회사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며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의료보호문제를 등한시했다”며 ‘텍사스 주지사로서의 부시의 실정(失政)’을 공격했고 부시 후보는 이에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어 후보가 부시 후보의 약점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바싹 당겨 부동표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할 경우 전세를 뒤집을 수도 있다. 2000년대 초반의 미국을 이끌 지도자를 뽑는 11월 대선은 뚜껑이 열리는 순간까지 역대 대선사상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빙의 레이스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마지막인 3차 TV토론은 17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에서 열린다.

<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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