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인류모험史]500년전 아시아인의 기상

  • 입력 1999년 6월 8일 20시 06분


《지난 1000년의 역사는 위대한 모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찾아갔고,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향한 모험길에 올랐으며, 루이스와 클라크는 태평양을 향해 북미대륙을 횡단했다. 그리고 다윈은 갈라파고스섬으로 항해했다. 모험은 호메로스가 살았던 시절에도 있었다. 그러나 지식을 얻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는 탐험은 지난 1000년이 남긴 특별한 유산이다. 지난 1000년간의 모험은 레이프 에릭슨에서 시작돼 화성에 착륙한 로봇에서 끝났다. 뉴욕타임스는 6일 ‘밀레니엄 6부 기획 특집’중 세번째로 ‘지난 1000년 인류의 모험사’를 게재했다. 이번 특집을 6회에 걸쳐 소개한다.》

동아프리카의 케냐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파테’섬에는 케냐 본토사람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고대의 역사적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다.

올해 121세라는 이 마을 족장 브와나 음쿠 알바우리 노인을 힘들게 만난 후에야 비로소 원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서 온 배가 이 근처 바다에서 바위에 부딪혀 난파했다. 선원들은 ‘샹가’마을 근처 해안으로 헤엄쳐왔다. 내 조상들이 그자리에서 직접 그들을 보았다. 그 중국인들은 손님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도와 음식과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우리 여자들과 결혼했다. 그들이 지금 이 마을에 살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의 후손을 이 섬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전설에 대한 관심은 서양이 동양을 이긴 이유를 밝히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문제야말로 지난 1000년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수천년 동안 세계문명의 중심이었던 곳은 서양이 아니라 중국과 인도였다. 그런데도 궁극적으로 서양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게 된 것은 14세기 초반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변화 때문인 것 같다.

14세기초에 중국에서는 ‘정화’제독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항해를 떠났다. 이슬람교도이자 역적의 자식으로서 어렸을 때 거세당한 그는 원래 ‘주디’왕자의 총애받는 하인이었다. 그는 왕자가 자신의 조카인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지휘를 맡았는데 반란이 성공한 후 전세계를 항해하며 중국의 위대함을 보여줄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정화’는 300척의 배와 2만8000명의 선원이 참가한 초대형 함대를 거느리고 7번 원정했다. 이만한 규모의 함대는 그후 500년이 흐를 때까지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고로 콜럼버스는 1492년에 세척의 배와 90명의 선원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정화’의 배들은 또한 당시 최첨단기술로 설계된 것들이었다. 그의 배에 쓰인 기술이 유럽에 소개된 것은 그로부터 350년 후였다.

‘정화’는 콜럼버스보다 50여년 앞서 동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아랍상인들을 통해 유럽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정화’의 함대가 희망봉을 돌아 유럽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겠지만 당시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 유럽은 낙후된 지역이었다. 또 유럽의 특산물인 양모와 와인보다는 아프리카의 상아 약초 향료 등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정화’의 원정이 있은 후 아시아가 스스로 문을 닫아건 것은 아시아에는 재앙이었고 유럽에는 번영의 기회였다. 서구인들은 경제적 번영의 이유로 흔히 조상들의 근면성이나 민주적 행동, 지적인 능력 등을 꼽지만 유럽에 가장 큰 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15세기 중국 통치자들의 어리석음이었다.

1424년에 ‘정화’를 총애하던 황제가 죽은 후 중국조정을 장악한 것은 유학자 관리들이었다. 상업을 깔보고 명예와 효를 중시했던 이들은 ‘정화’의 후임자들의 항해를 중단시키고 새로운 배의 건조를 막았으며 민간 해운업에 규제를 가했다. 그리고 ‘정화’의 기록을 없애버렸다. 게다가 새로운 황제의 지원을 받아 3500척의 배를 갖고 있던 위대한 중국해군까지 부숴버렸다(오늘날 미국 해군은 324척의 배를 갖고 있다).‘정화’는 마지막 항해 도중에 죽어 바다에 매장되었다고 여겨진다.

‘정화’의 발자취를 따라 찾아간 ‘파테’섬에서 아시아인의 특징이 외모에 뚜렷이 나타나는 ‘파마오’씨족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파마오’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는 알바우리 노인의 이야기보다 자세했다.

“오래 전에 중국선원들이 아프리카왕들과 무역을 했다. 왕들은 선원들에게 기린을 주어 중국으로 데리고 가도록 했다. 중국배중 한척이 ‘파테’의 동쪽 바다에서 바위에 부딪혔고 선원들은 해안으로 헤엄쳐왔다. 그들은 그 지방의 여자들과 결혼했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그 마을의 이름을 ‘샹가’라고 지었다. 그것은 상하이(上海)에서 따온 말이었다. 나중에 ‘파테’씨족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샹가’는 파괴되었고 ‘파마오’는 도망쳤다.”

이들 이야기 중 기린이 나오는 부분에 특히 흥분됐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정화’가 중국에 처음으로 기린을 가져왔다고 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밖에도 ‘파마오’씨족 집에서는 중국도자기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발견되고 이들의 무덤도 케냐식보다는 중국식에 가깝다.

만약 ‘파테’근처 해안에서 정말로 중국배가 난파했다면 그것은 ‘정화’가 활동하던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정화’ 이전 시기였다면 살아남은 선원들이 기린에 대해 알고 있었을 리가 없고, ‘정화’ 이후였다면 생존자들이 ‘샹가’마을에 머물러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샹가’마을은 ‘정화’의 마지막 항해 직후인 1440년경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이론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파테’의 무덤에서는 중국글자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이 섬에서 항해기구가 발견된 적도 없다. ‘파테’섬을 떠나기 위해 해안으로 나오면서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고대 중국사람들이 좀더 외부지향적이었더라면, 그들이 ‘정화’의 뒤를 계속 이어나갔더라면 아시아는 아프리카와 유럽의 지배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파테’에서 본 것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가적 의지가 부족해서 좌절됐된 아시아의 진취적 기상이 남긴 흔적이었다.

▽필자:니콜라스 크리스토프〓뉴욕타임스 도쿄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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