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서의 루스벨트의 스타일과 성품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위기를 극복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늘 그렇듯이 독재의 형태를 강하게 띠었기 때문이다. 35년 그가 뉴 딜정책의 핵심인 NRA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보수적인 대법원 판사들을 교체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은 좋은 예다. 그는 각료회의를 자주 가졌지만 각료들과 중요 정책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하려들지 않았다.
성품면에서도 그는 참을성이 많고 따뜻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결코 남에게 털어놓지 않는 지도자라는 평도 따라다녔다. 그가 흔히 마키아벨리가 말했던 「사자와 여우」의 속성을 지닌 지도자로 인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이중성은 39세에 소아마비로 불구가 된 후 안으로 쌓인 경계심 때문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이민와 뉴욕에서 변호사로 성공했던 아버지 밑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하버드대(정치사)를 졸업한 후 뉴욕주지사가 되기까지 좌절이라곤 거의 없었던 순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사교적이고 부드러웠다.
그가 더글러스 맥아더와 벌인 신경전은 그의 성품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취임 직후 그는 공약대로 국방예산 대폭 삭감을 추진했다. 육군참모총장인 맥아더가 그를 찾아왔다. 맥아더는 국방예산 삭감에 항의하면서 『전쟁이 일어나 우리의 어린 병사들이 적군의 총검이 배에 꽂힌 채 진흙 바닥에서 죽어갈 때 그들이 저주하는 이름이 맥아더가 아니라 루스벨트이기를 바랍니다』라고 폭언을 퍼부었다.
루스벨트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당신, 대통령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냐』 맥아더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사죄와 함께 사의를 표하고 되돌아나오는 그를 루스벨트가 부드럽게 불렀다. 『장군, 어리석은 생각 말게. 이번 국방예산과 자네는 함께 가는 거야』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언론이다. 그는 언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일주일에 두번씩 기자들과 만났고 언론을 국민을 교육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언론 또한 협조적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던 그였지만 언론은 휠체어를 탄 그의 사진을 거의 신문에 쓰지 않았다.
〈워싱턴〓이재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