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사망]좌절과 집념의 생애

  • 입력 1997년 2월 20일 20시 01분


백두산에 오른 鄧 가족
백두산에 오른 鄧 가족
[북경〓특별취재반] 鄧小平(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안현(四川省 廣安縣)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서방 열강의 세력확대로 청조(淸朝)는 국내외적으로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농민봉기와 반란이 이어졌고 각지에 비밀 결사가 부단히 출현한 혼란의 시기였다. 그의 부친 鄧文明(등문명)도 큰 영향력을 가진 가로회(哥老會)란 비밀결사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어린 시절 정상적 교육을 받고 프랑스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부유하고 교육열도 높은 가정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鄧小平(등소평)은 부친과 부친의 두번째 부인 譚(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생모사후 부친의 네번째 부인 夏(하)씨가 길렀다. 그의가정에 관한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부친은 첫번째 부인 張(장)씨에게선 소생이 없었고 두번째 부인 담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인 등소평 등 3남 1녀를 두었으며 세번째 부인 肅(숙)씨로부터 아들 한명, 네번째 부인 하씨로부터는 딸 두명을 얻었다. [노동하며 유학생활] 등의 본명은 鄧布賢(등포현)이며 소학교를 다닐 땐 鄧先聖(등선성)으로 불렸다. 그가 현재의 이름인 소평으로 개명한 때는 파리와 모스크바에서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 공산당 지하활동을 시작한 1927년이다. 등소평은 1920년 청조붕괴후 16세때 새로운 문물과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새로운 이념이 홍수를 이룬 때 중국을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의 유학은 노동과 학습활동(勤工儉學)의 방식이었으며 당시 이런 식의 프랑스 유학생은 1천5백명이었다.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이미 중경(重慶)의 학교에서 프랑스어반에 다녔었다. [브리지게임에 몰두] 1920년 10월 마르세유에 도착한 그는 파리부근의 도시들을 오가며 고무공장 자동차공장에서 육체노동자 생활을 했고 중학교도 옮겨가며 다녔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큰 변수가 된 공산주의와 접하게 됐다. 특히 평생 그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갖게 된 周恩來(주은래)와 만난 것도 그때였다. 주은래는 당시 이미 학생리더로 이름이 알려졌고 등소평보다는 6세위였다. 또한 그의 평생취미인 브리지게임도 프랑스생활에서 익히게 됐다. 주은래가 귀국한 이듬해인 1925년부터 그는 중요한 일을 맡기 시작했고 집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중국인 단체중 반공단체의 고발로 경찰의 수사를 받자 동료 한명과 함께 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떠났다. [26년부터 혁명동참] 등소평은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했다. 중산대학은 소련정부가 중국 국민당과 합작이후 1925년부터 5년간 개설된 학교로 당시 중국유학생중엔 공산당원도 있었고 국민당원도 있었다. 등소평은 프랑스와 소련의 외국생활을 끝내고 1926년 귀국, 중국혁명의 길에 동참했다. 등소평은 공산당 지하활동을 시작한 1927년 상해(上海)에서 첫부인 장천원과 결혼했다. 그러나 첫부인 장씨는 난산으로 사망했다. 두번째 부인 金維映(김유영)과 1931년 결혼했으나 1933년 이혼했다. 이후 金은 중국공산당창설의 주요멤버이고 당 통전부장(統戰部長)을 역임한 李維漢(이유한)과 결혼, 李鐵映(이철영·현정치국원)을 낳았는데 이철영은 등의 사생아라는 풍문도 나돈다.세번째 부인 卓琳(탁림·79)과는 1940년결혼,2남3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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