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미술관에 가다/한지영 지음/304쪽·2만6000원·북피움
발레 통해 ‘신’과 자신 동일시
‘밤의 발레’ 첫 공연 직접 연기
명화 속 발레 이야기 풀어내
‘태양왕’으로 불린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1638∼1715)는 발레를 권력의 언어로 활용했다. 그는 1653년 파리에서 초연된 ‘밤의 발레’ 무대에 직접 올라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기했다. 신이 부여한 왕권을 믿었던 루이 14세에게 발레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인 아폴론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이었다. 앙리 드 지세가 그린 초상화에는 금빛 의상과 티아라를 쓴 루이 14세가 발끝을 곧게 세운 채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은 발레의 역사와 진화, 그리고 무용수들의 무대 뒤 이야기까지 담은 교양서다. 발레를 전공하고 국민대 공연예술학부에서 강의하는 저자가 명화 속 발레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에드가르 드가(1834∼1917),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 등 거장들의 작품 170여 점이 함께 실려 있어, 그림을 보며 발레의 다양한 순간을 감상할 수 있다. 무대 위의 화려한 장면뿐 아니라, 연습실에서의 고된 시간과 지친 표정까지 포착한 명화들이 발레의 현실을 생생하게 전한다.
책은 ‘발레의 어머니’로 불리는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출신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그녀는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청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웠다. 그녀가 기획한 ‘왕비의 코미크 발레’는 일관된 스토리를 지닌 첫 무용극으로, 발레가 오페라나 연극과 구분되는 독립 장르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책은 발레가 단순히 몸짓이 아니라 인간이 완벽함을 향해 몸으로 빚어낸 문화의 결정체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지젤’, ‘백조의 호수’ 같은 명작의 탄생 배경과 안나 파블로바(1881∼1931), 바츨라프 니진스키(1889∼1950) 등 불멸의 무용수들의 삶을 통해 예술의 변화를 짚는다.
솔로가 아닌 군무를 추는 무용수를 가리키는 ‘코르 드 발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여성 무용수 32명이 함께 춤을 추는 군무다. 그러나 이들은 솔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 몸으로 박자와 줄을 칼같이 맞춰야 한다. 이런 ‘인간 병풍’을 만든 클래식 발레가 가혹하게 느껴지는 한편, ‘코르 드 발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마지막 장에선 발레 안의 이국적인 요소들을 짚으며 시야를 확장한다. ‘돈키호테’의 스페인 춤, ‘라 바야데르’의 인도 분위기와 ‘호두까기 인형’의 캐릭터 댄스 등 발레의 진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갈 수 있다.
발레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쉽고 흥미로운 입문서이자, 이미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깊이 있는 해설서가 될 것 같다. 명화와 함께 발레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발레가 더 이상 멀고 어려운 예술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숨 쉬는 문화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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