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떠오른다, 가자… 남원, 달을 품은 마을[여행스케치]

  • 동아일보

전북 남원 광한루원에 밤이 깊었다. 하늘의 달이 지상에 투영된 공간에서 광한루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연못에 달도, 나도 떠 있다.
전북 남원 광한루원에 밤이 깊었다. 하늘의 달이 지상에 투영된 공간에서 광한루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연못에 달도, 나도 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 기둥일 터다. 몽룡이 서쪽을 바라보며 기대어 실성한 듯 외쳐댄 곳이. “저기 저 건너 운무중(雲霧中)에 울긋불긋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사람이냐, 신선이냐? … 나 보기에는 아마도 사람이 아니로다. 천년 묵은 불여우가 날 호리려고 왔나 보다!”(‘교주 남원고사·校註 南原古詞’, 정길수 교주, 알렙, 2024) ‘청천(晴天)에 떠 있는 송골매도 같고, 석양에 나는 물 찬 제비도 같은’ 춘향이 그네 뛰던 곳은 오작교(烏鵲橋) 곁이었을 테고.

광한루 누각 기둥 서쪽으로 오작교가 보인다. 몽룡이 이곳에서 지켜보던 그때 춘향은 저쪽 어딘가에서 그네를 탔을 터다.
광한루 누각 기둥 서쪽으로 오작교가 보인다. 몽룡이 이곳에서 지켜보던 그때 춘향은 저쪽 어딘가에서 그네를 탔을 터다.
전북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만큼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엮여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장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광한루에 올라 춘향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춘향은 현재의 연인일 수도 있고, 짝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첫사랑의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판소리 한 마당, 소설 한 편으로 이 같은 정념을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다. 광한루 마루에 앉아 눈앞의 연못 연지(蓮池)를 바라보니 그건 아무래도 달(月)인 듯하다.

달을 품은 도시, 남원

남원은 광한루라는 달을 품은 도시다. 광한루로 대표되는 광한루원은 사실 달을 땅에 투영한 것이다. 조선 세종 시절 전라관찰사 정인지가 광한루에 올라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예 아니더냐”고 한 데서 모든 게 시작됐다. 중국 당나라 현종이 달의 서울에 있는 궁전(월궁)에서 선녀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때 보니 현판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는 전설에서 따온 말이다. 황희 정승이 서울을 못 잊어 붙였을 법한 이름 ‘광통루(廣通樓)’가 달을 뜻하는 광한루로 바뀐 것이다.

광한루원 연못 연지에 조각배 한 척 떡 있다. 연지는 은하수를 상징한다.
광한루원 연못 연지에 조각배 한 척 떡 있다. 연지는 은하수를 상징한다.
이후 400여 년간 후손들이 한 일은 천상을 상징하는 달의 요소를 하나씩 보태는 일이었다. 광한루원 앞 섬진강 지류 요천(蓼川)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지는 은하수였고, 홍예문(虹霓門) 네 곳을 아래에 둔 돌다리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만나는 오작교였다. 연못에 송강 정철이 만든 자그마한 인공 섬 3개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따서 봉래(蓬萊·금강) 방장(方丈·지리) 영주(瀛洲·한라)의 삼신도(島)가 됐다.

광한루원 연지에 놓인 영주섬 영주각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그의 딸은 명창 황애리 씨다.
광한루원 연지에 놓인 영주섬 영주각 앞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춘향가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그의 딸은 명창 황애리 씨다.
1970년대까지 광한루 정면에 붙어 있던 현판 ‘계관(桂觀)’은 어떤가. 월궁에 있다는 계수나무 높은 궁전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 무제가 수도 장안에 만들었다는 관(觀) 이름이기도 하다. 관은 루(樓)와 같다. 훗날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자 이를 지탱하기 위해 중층 계단을 이어 붙이고 지붕을 씌웠는데 이를 월랑(月廊)이라고 한다. 달에 토끼와 같이 산다는 두꺼비를 형상화한 돌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토끼와 경주한 거북이는 광한루 앞 연못에서 오작교를 바라보는 ‘자라돌(鼈石)’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전통적인 정원 유형을 월궁조원(月宮造園)이라고 한단다.

광한루 누간 내부에 걸린 ‘계관’ 편액. 달의 궁전에 있다는 계수나무 높은 집을 뜻하면서 동시에 달을 바라보기에 좋다는 뜻도 있다.
광한루 누간 내부에 걸린 ‘계관’ 편액. 달의 궁전에 있다는 계수나무 높은 집을 뜻하면서 동시에 달을 바라보기에 좋다는 뜻도 있다.
동쪽에서 바라본 광한루. ‘호남제일루’ 현판이 보인다. 오른쪽 지붕을 인 중층 계단을 월랑이라고 부른다.
동쪽에서 바라본 광한루. ‘호남제일루’ 현판이 보인다. 오른쪽 지붕을 인 중층 계단을 월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상상 속 달의 공간만은 아니다. 실제로 달을 보는 명승이었다. 계관이 달리 계관이 아니다. 계수나무, 즉 달을 바라보기(觀)에 이만큼 좋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은 광한루원을 돌담이 둘러싸고 있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방은 트여 있었다. 남쪽으로 400년 전 밤나무 울창하던 터에 시장인 율장(栗場)이 섰고, 요천 너머 금암봉 승월대(乘月臺)로 달이 올라왔다.

광한루원 남쪽 승월대 저 멀리 남원항공우주천문대 돔과 집라인을 타던 춘향타워가 보인다.
광한루원 남쪽 승월대 저 멀리 남원항공우주천문대 돔과 집라인을 타던 춘향타워가 보인다.
한국인에게 달은 특별하다. 어머니들은 정화수 떠 놓고 달에 빌었다. 자녀의 건강을, 남편의 장도(壯途)를, 부모의 만수무강을. 연인들은 달을 보며 빌었다. 사랑의 성취를. 달은 나였고 너였고 우리였다.

약 90년 전 한 언론인은 말했다. ‘조선에 루(樓)라는 이름의 유명한 사적 건물은 거의 산 아니면 구릉에 있다. 안주 백상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 다만 광한루는 평탄한 시가지 한가운데 놓여 있다. … 이 모든 루가 자연의 신세를 져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지나지 못하나 광한루만은 자연이 루의 신세를 져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서춘, 조선일보 1936년 8월 4일자) 달리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가 아니다. 그럼 옛 가객들이 ‘달세계’라 부른 청허부는 어디 있냐고? 정문 현판을 보면 된다.

광한루.
정령치에서 반달을 보다

달과 가까이 가 보자. 남원 주천면과 산내면에 걸쳐 있는 지리산 정령치(峙)다. 해발 1172m 고갯마루에 정령치 휴게소가 있다. 전망대에서 30여 계단을 오르면 남원을 동과 서로 가르는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에 서면 동으로 바래봉과 뱀사골 계곡이, 서로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등이 내다보인다. 지리산 주요 능선과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정령치 서쪽 경개. 천왕봉 세석평전 반야봉 등이 저 멀리 있다.
지리산 정령치 서쪽 경개. 천왕봉 세석평전 반야봉 등이 저 멀리 있다.
남북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산마루와 산마루를 잇는 선) 생태 축이기도 하다. 과거 길을 내서 끊어져 있던 것을 그 아래로 터널을 뚫어 길을 돌리고 상당히 복원했다. 백두산까지 1300km쯤 남았다고 이정표가 말한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정령치 능선 오솔길에 서니 동쪽은 운해(雲海)로 자욱하고 서쪽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구름이 능선을 넘어가려 애쓰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드론 카메라를 띄워 한쪽 구름바다와 다른 쪽 구불구불 겹친 산들이 어깨를 맞댄 광경을 찍고 싶지만, 이곳은 국립공원이다. 사전 허락을 받을 생각도 못 했다. 아쉬운 마음에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생각한다. 하얀 구름과 푸른 산이 반반이었다. ‘흠, 반달이로군.’

정령치 고갯마루 능선. 한쪽이 구름으로 가득하다.
정령치 고갯마루 능선. 한쪽이 구름으로 가득하다.
내려오는 김에 아주 내려오자. 달궁계곡이다. 그래, 맞다. 또 달이다. 원래는 ‘달 궁전’이었는데 궁에 이른다는 뜻의 달궁(達宮)으로 바뀌었다. 삼한시대 궁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높이 1000m를 훌쩍 넘는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산내면 달궁마을에서 이웃한 심원마을까지 약 6km를 물이 흐른다. 심산유곡이다.

가을 단풍도 좋지만, 계곡가에서 바라보는 달빛 또한 운치 있을 듯하다. 계곡 위 도로에 펜션과 식당이 수십 곳.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공간에 식탁들이 늘어섰고, 곳곳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 야밤 음주는 위험하지만 반주 한잔 정도는 어떨까.

달궁계곡에 해가 기운다. 단풍과 달맞이를 함께하면 더 좋겠다.
달궁계곡에 해가 기운다. 단풍과 달맞이를 함께하면 더 좋겠다.
어머니와 연인만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대작(對酌)하는 달을 벗처럼 여겼다. ‘월하독작(月下獨酌, 달 아래서 홀로 술 마신다)/아가월배회(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고)/아무영영란(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는 어지럽다)’(이백 ‘월하독작’ 중에서)

달에 가까이 가는 법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살아 있는 화가를 위한 공간이다. 남원 출신 김 화백이 기증한 자신의 대표작들과 문학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미술관 건축 자체가 또 다른 그림 같다. 본관으로 들어가는 낮은 경사의 길 양쪽은 다랑이논 구조다. 논배미 같은 층마다 찰랑찰랑 담긴 물에 사람이 보이고, 건물이 보이고, 달이 보일 것이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들어오는 길. 양쪽으로 다랑이논처럼 물길이 만들어졌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들어오는 길. 양쪽으로 다랑이논처럼 물길이 만들어졌다.
미술관 내부 서너 곳에 조명을 어둡게 한 작은 방들이 있다. 밖이 내다보이는 벽 하나는 통창이다. 마련된 벤치에 앉아 야외를 바라보도록 했다. 숲이, 소나무가, 물이 그리고 하늘이 보인다. 밤에는 물론 달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보게 된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내부 작은 방. 통창으로 밖이 내다보인다. 보는 것은 바깥 경치뿐일까.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내부 작은 방. 통창으로 밖이 내다보인다. 보는 것은 바깥 경치뿐일까.
남원은 10월에 3대 축제를 연다. 광한루원을 밤에 볼 수 있는 남원국가유산야행과 흥부제, 그리고 ‘2025남원국제드론제전 with 로봇’이다. 특히 올해는 드론에 열중하는 모양새다. 드론은 날아 달 가까이 올라간다. 드론을 날리는 일은 어쩌면 달이 되어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중국 전설에서 달에는 선녀 항아(姮娥)가 산다. 상아(嫦娥)라고도 한다. 중국은 2004년부터 달 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해 2013년 세계 세 번째로 탐사선을 달에 착륙시켰다. 그 프로젝트 이름이 ‘창어(상아·嫦娥의 중국어 발음)’다. 지금 남원에서 날리는 드론에 그런 웅대한 꿈이 담겨 있길 달에 기원한다.

지난달 17~19일 남원에서 열린 ‘2025남원국제드론제전 with 로봇’ 행사장. GNC21 제공
지난달 17~19일 남원에서 열린 ‘2025남원국제드론제전 with 로봇’ 행사장. GNC21 제공

#남원#달을 품은 마을#광한루원#오작교#월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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