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건조해지는 계절, 왕실의 비방은 맥문동[이상곤의 실록한의학]〈126〉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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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예로부터 ‘건강한 강아지를 사려면 코가 촉촉한 강아지를 사라’는 말이 있다. 옛 사람들이 면역에 있어 코의 점액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코의 점액, 즉 콧물은 우리 몸에서 이물질을 걸러내는 첫 관문 기능을 한다. 끈끈한 점액은 면역글로불린, 호산구, 대식세포 등 다양한 면역세포들을 포함하고 있어 공기와 함께 침투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병원체를 파괴하거나 다시 뱉어낸다.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우리 건강을 방어하는 면역의 핵심 수비수 역할을 하고 있는 셈.

가을이 되면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산과 들의 모든 식물이 시들어간다. 도랑, 개천, 계곡의 물도 말라 버린다. 인간의 코도 기온이 내려가면 건조해지면서 바싹 말라 예민해진다. 물은 사물을 윤택하게도 하지만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호흡기에도, 소화기에도 물이 주성분인 점액이 나와 외부의 적을 걸러내고 우리 몸을 보호한다. 우리 몸의 사령부 기능을 하는 뇌도 척수액으로 자신을 지킨다.

가을의 면역성 질환인 알레르기 비염도 점액과 깊은 관계가 있다. 콧물이 적당하게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는 자극(차가운 공기, 온도 변화, 꽃가루, 풀의 가루 등)이 코가 마르면서 점막에 이물감을 일으키는 것. 콧물이 마르며 약해진 면역체계는 이런 자연적 자극을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으로 오인하고 과민 반응을 일으킨다. 콧물, 재채기, 가려움증 등은 가을 알레르기 비염이 일으키는 극성스러운 반응인 셈이다. 이물질을 씻어내고, 밀어내며, 긁어내 방출하려는 몸의 몸부림이자 방어 작용이다. 양방에서 알레르기 비염을 면역 과잉 질환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름의 끝자락인 지금, 전국은 초가을의 전령인 보라색 맥문동(麥門冬) 꽃으로 한창이다. 동네 작은 오솔길부터 경북 경주, 성주, 충남 서천 지역의 산과 들에 이르기까지 흔히 볼 수 있다. 이 맥문동의 촉촉한 뿌리 부분은 가을 메말라가는 호흡기와 코에 윤기를 더하는 가장 좋은 약물이다. 차가운 공기를 호흡하는 폐는 늘 건조해지기 쉬운 장기이다. 한의학에서 ‘폐는 건조한 것을 싫어하여 늘 촉촉하게 해주어야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의학은 폐의 건조함을 해소할 가장 좋은 약물로 맥문동을 꼽는다. 맥문동의 한자어 ‘麥門冬’도 보리처럼 겨울에도 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맥문동이 사철 푸를 수 있는 이유는 소나무처럼 양(陽)의 힘이 강하기 때문. 맥문동은 이런 양적 기운으로 차갑고 건조해진 코와 폐를 촉촉하고 매끄럽게 윤기가 돌게 한다. 점액을 만들어 면역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조선의 왕들도 지금의 알레르기 증상을 맥문동으로 치료했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선조는 재위 34년 쏟아지는 콧물을 진정시키는 데 맥문동을 넣은 약재를 처방했고, 인조도 재위 23년에 반복되는 기침을 맥문동을 넣은 약재로 치료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맥문동 마니아였다.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 이후 마음의 화(火)로 바짝바짝 마른 목과 기관지의 갈증을 맥문동 차로 해결했다. 맥문동 차와 맥문동 탕 같은 한약뿐 아니라 맥문동 정과와 같은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맥문동이 이만큼 왕실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은 거꾸로 그만큼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 기능 약화 현상이 심했다는 반증이다. ‘지극히 높으면 지극히 위태롭다’는 경구는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가 되새겨야 할 진리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코#건조#왕실의 비방#맥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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