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섬뜩함… 영화보다 더 무서운 건 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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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배경 공포영화 ‘마녀’를 본 직장인 5명의 ‘우리 직장 마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직장 동료? 평범한 직장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마녀’는 ‘일상적이기에 더 무서운’ 공포를 보여준다. 카라멜 제공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직장 동료? 평범한 직장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마녀’는 ‘일상적이기에 더 무서운’ 공포를 보여준다. 카라멜 제공
《 “오늘 밤 8시까지 마감 못하면 손가락 하나 자를 수 있어?”
팀장 이선과 신입사원 세영은 결재서류를 두고 홧김에 손가락을 건 내기를 벌인다.
그런데 팀장은 세영에 대한 오싹한 소문을 듣는다.
서류를 마무리한 세영의 손엔 가위가 들려 있다….
11일 개봉한 영화 ‘마녀’(감독 유영선·청소년관람불가)는 독특한 지점을 건드리는 작품이다.
이 땅에 2500만 명이나 된다는 직장인들이 집만큼 오래 머무는 회사란 공간에 공포를 덧칠했기 때문이다. 가위나 스테이플러, 심지어 머그컵과 연필깎이마저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설정은 ‘일상의 섬뜩함’을 전하는 데 단단한 역할을 한다.
제작비 3000만 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라기엔 짜임새가 헐겁지 않고, 주인공 세영(박주영)의 서늘한 눈빛도 여운이 짙다.
허나 진짜 뒷목 찌릿한 대목은 ‘손가락 내기’가 아니다.
오히려 심장은 극중 사무실의 평범한 대화에서 쿵쾅거린다.
현실이 그렇지 않나. 상사나 동료의 무신경한 언행이 때론 마음을 할퀴는 칼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20∼40대 직장인 5명에게 ‘상사나 동료가 마녀로 보였던 순간’을 물어봤다.
첨엔 모두 미적거리더니 익명을 보장하자 무섭게 달려들었다. 》     
      

결재서류를 놓고 상사와 손가락 내기를 한 신입사원 세영. 카라멜 제공
결재서류를 놓고 상사와 손가락 내기를 한 신입사원 세영. 카라멜 제공
○ 그 상사 “대학을 나오면 뭐해”

A 대리=영화 속 팀장의 막말은 아무것도 아냐. 초등학교, 가정교육까지 들먹이는 상사도 많아. 옆 부서 부장은 명문대 나왔다고 얼마나 거들먹거리는데. 또 연애까지 간섭하는 인간도 있어. 아니 남의 애인이 살을 빼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B 사원=우리 팀장은 결재 올리면 일단 불러서 옆에 세워둬요. 10분 넘게 한마디 없이 한숨만 쉬어. 차라리 욕을 하든지, 미쳐버리겠어요. 그러곤 기껏 하는 한마디가 “다시 올려”예요. 가끔 하는 칭찬도 짜증 나. “간만에 제대로 했네”가 뭐야.

C 과장=전 직장 선배는 내 듀○ 라이터에 눈독을 엄청 들였어. 담배 피울 때마다 가져가 한참 뒤에 돌려줘. 결국 비슷한 걸 선물로 줬어. 그랬더니 하는 말이 “뭐가 더 비싼 거야?”

A 대리=근무시간 잔소리는 일이니 참을 만해. 제발 휴일에 등산 가자고 안 부르면 좋겠어. 이번 추석 때 고향이 같은 과장이 술 먹자고 전화했어. 핑계 대고 안 갔는데, 연휴 끝나고 보니 눈빛이 냉랭하네.

D 팀장=쉰 다 된 부장이 요즘 술집 마담한테 꽂혔어. 자꾸 꽃이니 뭐니 선물 배달을 시켜. 여자들이 좋아하는 속옷 스타일이 뭔지도 알아 오래.

○ 그 후배 “팀장님,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B 사원=회식만 잡히면 쏙 빠지는 후배는 정말 얄미워. 누군 좋아서 가나. 근데 한우나 뭐 비싼 거 먹을 땐 와. 걔 외근 핑계대고 피부 관리 받으러 다니는 것도 여직원들은 다 알아.

E 대리=신입이 들어왔는데 뭘 시켜도 심드렁한 거야. 심지어 일 마무리 못해서 딴 선배가 야근하는데 퇴근해버려. 어느 날 술 좀 먹였더니, 자긴 여기서 썩을 인재가 아니라나. 6개월쯤 지나 이제 일 좀 한다 싶으니 사표 내더라.

A 대리=몇 번씩 기한 어길 땐 환장하겠어. 설명을 해도 알아듣는 거 같지도 않고…. 그래놓고 술자리에선 훌쩍거리며 왜 자기만 미워하냐고 하네. 뭣도 모르는 과장은 나보고 뭐라 그러고.

○ 그 동료 “○○ 씨에 대해 들은 얘기가…”

D 팀장=팀에 ‘배트맨’이라 불리는 친구가 있어. 영웅이 아니라 박쥐라서. 여기선 후배 모략, 저기선 상사 험담하느라 바쁜 스타일. 첨엔 싹싹해서 다들 좋아했는데, 갈수록 실체를 알게 됐지. 한번은 어느 과장이 처제한데 용돈 주는 걸 보고 원조교제로 소문냈다가 엄청 곤욕 치렀지.

E 대리=예전에 사내소문만 듣고 무심결에 말 옮긴 적 있는데, 당사자가 결국 관뒀어. 근데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더라고. 어찌나 미안하던지…. 조직에서 마녀는 사람이 아니라 ‘세치 혀’야.

C 과장=영화에서 마녀가 “사랑받는 것들은 다 죽어야 해”라고 말하잖아. 조직에선 결국 업무능력이 선악의 기준이지. 일 잘하면 사랑받고, 못하면 마녀 되는 거야. 진짜 무서운 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 같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마녀#영화#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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