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무산일기’의 주인공 승철(오른쪽)은 남한에서 어디 한 곳 마음 둘 데 없는 탈북자. 동네 건달들에게 수시로 폭행당하고 짝사랑 상대에게도 무시당하는 그에게 거리에서 만난 개 ‘백구’는 유일하게 교감을 나
누고 진심을 전하는 대상이다. 영화사 진진 제공
‘무산일기’(4월 14일 개봉)의 박정범 감독은 권투선수에 비유하면 ‘인파이터’다. 상대의 펀치를 요리조리 피하며 링을 빙빙 도는 ‘아웃복서’와 달리 인파이터는 저돌적으로 주먹을 날리며 상대에게 파고든다. ‘무산일기’에서도 박 감독은 강력한 메시지를 사정없이 날려대고,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남한 탈북자들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따온 제목부터 불편하다. 박 감독의 대학(연세대 체육교육과) 후배인 탈북자 고(故) 전승철 씨의 고향이 무산인데, 박 감독은 전 씨에게서 전해들은 탈북자의 생활에 상상력을 곁들여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무산은 탈북자들의 처지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새터민들은 ‘무산자(無産者) 계급(프롤레타리아)’이 없다는 ‘지상낙원’ 북한을 무산의 상태로 탈출해 여전히 무산자 계급으로 살아간다. ‘따듯한 남쪽 나라’에 왔지만 그들에게 남한은 여전히 ‘무산의 땅’이다.
탈북자 시설 하나원에서 나온 주인공 승철(박정범)은 ‘125’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받는다. 이 주홍글씨는 어디를 가나 그를 ‘우리’가 아닌 ‘그들’에 속하게 한다. 취직을 돕는 박 형사(박영덕)가 승철에게 “북에서 왔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 것처럼 남(南)의 시선은 차갑다.
남쪽의 삶은 나이트클럽 전단 붙이기와 음란 전단 돌리기로 시작되지만 ‘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다른 전단 작업자들에게 협박당하기 일쑤다. 철거촌 임대아파트에 사는 승철에게 동네 건달들은 “눈에 띄지 말라”며 수시로 주먹을 날린다. 짝사랑하는 여인 숙영(강은진)의 노래방에 취직해 그가 배운 첫 번째는 단속에 걸리지 않고 맥주를 파는 노하우다. 꿈에 부풀어 온 남쪽이지만 이곳의 부조리한 삶은 항상 승철을 배반한다.
승철과 주변의 탈북자,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위선자로 비친다. 승철의 탈북자 친구 경철은 승철의 옷을 사주는 척하며 옷을 훔치고 미국제 옷과 위스키를 즐긴다. 미국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철은 탈북자들에게 사기를 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숙영은 노래방 손님들에게 도우미를 소개하는 일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승철에게 “내 직업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며 품위 있는 교인으로 행세한다.
승철 역시 위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궁지에 몰린 경철을 속이는 그의 비정함은 곤경에 처한 노래방 도우미를 돕던 순수한 모습과 대비돼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창동 감독의 ‘시’의 조감독 출신인 박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을 선보인 뒤 한국 영화의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영화는 8000만 원을 들여 찍은 학교(동국대 영상대학원) 졸업 작품인데 국제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있다.
13일 프랑스 도빌아시안영화제에서는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경쟁 부문에 올라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지난해에는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 모로코의 마라케시 국제영화제 대상,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대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다음 달 5일에 폐막하는 홍콩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트라이베카 영화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등에도 초청된 ‘무산일기’가 수상 행진을 이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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