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공기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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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5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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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어가는 인형\'이라는 소재의 판타지 일본 영화 \'공기인형\' . 한국 배우 배두나가 공기인형 노조미 역할을 맡았다.
\'사람이 되어가는 인형\'이라는 소재의 판타지 일본 영화 \'공기인형\' . 한국 배우 배두나가 공기인형 노조미 역할을 맡았다.
'인간적'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 경우 이 단어를 쓴다. 마음이 따뜻해 보일 때 기계나 동물 등에 반대하는 의미로. 또는 실수 따위를 해서 허술한 면을 보일 때 완벽한 신에 반대하는 의미로.

하지만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면 이 단어는 '사람의 성격·인격·감정 따위에 관한. 또는 그런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이 착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비열하거나, 또는 냉정해도 다 '인간적'이란 말이 된다. 모두 사람의 성격, 또는 인격에 관한 것이므로.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제로는 사전과 다른 의미로 이 단어를 쓰는 걸까. 혹 '인간적이라고 명명하고 싶은 면'을 '인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닐는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공기인형'에는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인간적'인 면이 모두 담겨 있다. 그것이 아름답든 아름답지 아니하든, 또는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아니하든,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모든 면이 고스란히 나열돼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가, 화가 났다가, 쓸쓸하다가, 슬퍼지는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게 된다. 그것이 아름답건 아름답지 아니하건, 또는 느끼고 싶건 느끼고 싶지 아니하건, 적나라하게 '인간적'으로 말이다.
우연히 찾게 된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 노조미는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우연히 찾게 된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한눈에 반한 노조미는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 고독하거나 두렵거나 비열하거나…

하나, 영화 속 인물들은 고독하다.

중년 남자인 히데오는 혼자 살고 있다. 여자 친구와는 몇 년 전에 헤어졌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욕구해소용 공기인형, 이른바 '섹스 돌'을 샀다. 그리고 이 공기인형에 노조미라는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붙였다. 이제 노조미는 비가 올 것이니 우산을 챙기라는 잔소리도 하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주기도 하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같이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름 만족스럽다. 하지만 히데오는 홀로 늙어가는 자신을 외면할 수 없다. 노조미는 처음 왔을 때 그대로인데.

비디오 가게 점장은 늘 혼자 밥을 먹는다. 찬은 아주 간단하다. 묵묵히 밥을 먹던 어느 날, 그는 젓가락을 던지고 그릇을 엎어 버린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 식사는 생활이 되지만, 혼자 먹을 때는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그저 식욕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가, 문득 참을 수 없다.

둘, 영화 속 인물들은 두렵다.

한 여자가 전화로 수다를 떤다. 그는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노처녀다. 어느 날부턴가 동료의 시선은 젊고 예쁜 신입 여사원에게만 향한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고, 소외되는 것도 두렵다. 집에만 돌아오면 얼굴에 팩을 붙이고 종아리에는 마사지기를 달아 놓지만, 그녀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은 전화 너머의 목소리다.

한 동네에 사는 다른 여자는 거식증에 걸렸다. 집에는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가 가득하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어두침침한 집을 나서는 것은 장을 보기 위해 동네 마트에 가는 때뿐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그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가족들의 전화도 거부한다.

셋, 영화 속 인물들은 때로 비열하다.

비디오 가게 점장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게 된 노조미가 히데오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다. 그리고 노조미를 협박한다. 히데오와 공원에 앉아 키스를 하는 것을 보았다고. 그러면서 같은 가게 점원인 준이치와도 동시에 사귀는 게 아니냐고. 이를 빌미 삼아 노조미와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오히려 뻔뻔하게 노조미를 일갈한다. "요즘 아이들이란 섹스를 이렇게 쉽게 하지."

보고 싶지 않다. 외면하고 싶은 추함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적'인 면의 하나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넷, 영화 속 인물들은 공허하다.

노조미는 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저는 속이 비어 있어요" 라고. 그러자 노인은 대답한다. "요즘은 다들 그래. 가슴이 온통 비어 있지."

속이 비어있는 자신의 출생이 궁금한 노조미는 고향인 인형 공장을 찾아간다. 그곳 한 켠에는 수거된 폐 인형들이 가득 쌓여있다. 그 인형들을 만들었던 소노다는 노조미에게 말한다.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이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얼굴이 다르게 변해 있다고. 하지만 그 인생이 어떠했든 간에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살았던 인형들은 결국 재활용 쓰레기로 수거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이 인형들의 삶이 인간보다 나을지 모른다. 인간은 숨이 끊어지면 재활용도 안 되는 소각용 쓰레기가 되니까.

우리 모두가 차가운 도시 속에 섞여 사는 것처럼, 이 모든 인간적인 면들은 경계의 구분 없이 영화 속에 녹아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외롭거나 두려워하고, 때로는 비열하며, 대체로 공허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이들은 현대인의 삶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듯 보이지만, 결국은 일상생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인형 장인 소노다 역으로 나오는 일본 톱스타 오다기리 조.
인형 장인 소노다 역으로 나오는 일본 톱스타 오다기리 조.

▶ 현대 사회의 슬픈 인간상 관조적으로 담아내

사실 영화의 주인공은 공기인형 노조미이다. 그가 마음을 가지게 되고, 사랑을 하고, 인간관계를 배우는 과정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축이다. 하지만 백지 같은 그의 시각을 통해 오히려 부각되는 것은 이렇듯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슬픈 인간들이다. 그리고 이 인간들의 삶을 비추는 데 있어서 영화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슬픔의 카타르시스를 주지도 않고, 가슴 설레는 사랑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 속에는 섬뜩한 현실이 관조적으로 담겨 있고, 때로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무미건조하게 그려진다. 혹자는 이러한 고레에다 감독을 '양의 탈을 쓴 악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독하다고 해야 하나. 때로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잔인하다.

이는 그의 영화 대부분에 흐르는 일관된 세계이기도 하다. 전작인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열두 살 된 소년이 뇌진탕으로 덧없이 죽은 어린 막내 동생의 시신을 스스로 묻었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동생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공항 근처로 시체를 가방에 담아가서 말이다. '걸어도 걸어도' 속 어머니는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물에 빠져 죽은 자신의 아들이 살려냈던 소년을 놓아주지 않는다. 찾아주어 고맙다고 허리를 조아리면서도, 이제는 청년이 된 그에게 내년에 또 보자는 말을 잊지 않는다. '공기인형'의 히데오는 인형과의 섹스 후 인형의 인공성기를 꺼내어 자신의 배설물을 비누로 닦아낸다. 너무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집요하게 말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리지 말고 끝까지 바라보라고. 이것이 결국 우리들의 참모습 아니냐고.
자신의 출생이 궁금한 노조미는 고향인 인형 공장을 찾아간다. 그곳 한 켠에는 수거된 폐 인형들이 가득 쌓여있다.
자신의 출생이 궁금한 노조미는 고향인 인형 공장을 찾아간다. 그곳 한 켠에는 수거된 폐 인형들이 가득 쌓여있다.

▶ 인형 '노조미' 연기한 배두나의 깊은 존재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우리의 자화상이 비참함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시작은 미약할지 모르나 끝은 창대 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결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준이치를 소각용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린 노조미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리는데, 그녀의 숨은 민들레 홀씨가 되어 동네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이제 노조미가 없는 세상에서 삶을 이어나갈 인물들 위에 하나씩 내려앉는다. 마치 이 씨앗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몫이라는 과제를 남기는 듯이 말이다.

한편, 영화의 완성도를 살피며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배두나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그는 굳이 많은 것을 보여주려 애쓰지 않는다. 대사를 많이 하지도 않고,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녀에게는 '저, 이제 연기 합니다'라는 과시가 없다. 전라의 연기조차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다. 단지 마음을 가지게 된 인형 노조미로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보여준다. 그는 과감하고, 진지하며, 동시에 몰입해있다.

저예산 인디영화인 만큼 스펙터클한 볼거리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판타지적인 소재를 사용했으니 현실감이 떨어지는 작위적 설정을 찾으라면 수십 가지도 찾을 수 있다. 화사하고 밝은 봄날 아기자기한 영화를 한 편 보고 싶은 관객들 역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서 이 작품을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대가 뭉클하면서도 진저리 처지는 스스로의 자화상을 대할 용기가 있다면, 이 영화를 놓치지 말라 권하고 싶다.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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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 인형’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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