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연모 따윈 새나 줘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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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3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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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변했다…드라마 ‘거친 여자들’ 득세

'알파걸' 신드롬의 여파일까. 2009년 드라마의 키워드는 '강한 여성'이다. 이전에는 남자의 전유물로 여겨진 배역에서 여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여전사, 여걸, 여왕이 등장한 데 이어 주부들까지 독해졌다.

여자들이 득세하는 드라마 세계에서 남자들은 '초식남' '찌질남'으로 전락했다. 세상 바뀐 줄 모르고 큰 소리 치던 '마초' 드라마('외인구단' '친구' '남자이야기')들은 시청률 전쟁에서 줄줄이 참패했다.

현대극과 사극을 넘나들며 급부상한 '무서운 여자들'을 소개한다. "남자들 다 죽었어!"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여전사 \'김선화\' 출처 :KBS
\'내 남자는 내가 지킨다\' 여전사 \'김선화\' 출처 :KBS


▶남자 보디가드 위협하는 북한 최고의 공작원 '김선화'

KBS '아이리스'의 북한 호위부대원 김선화(김소연 분)는 15년 전 '모래시계'의 과묵한 보디가드 재희(이정재)의 여자 버전이다. 재희가 목숨을 바쳐 혜린(고현정)을 지켰듯 선화는 김현준(이병헌)을 도우며 그림자 경호를 펼친다. '여자는 남자가 지켜야 한다'는 룰을 깼는데 반응은 대박이다. 여주인공 김태희 보다 김소연이 더 떴다.

선화는 헝가리에서 최고인민위원장 윤성철의 경호 실패로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고 가족까지 잃었다. 그런 선화에게 팀장 박철영이 준 마지막 임무가 남측 첩보기관 NSS의 멤버 김현준을 제거하라는 것. 선화는 일본 아키타현에서 현준 살해에 실패하고 오히려 그를 돕기로 한다.

NSS 수장인 백산(김영철) 측 부하들이 현준을 제거하려 할 때마다 선화는 안젤리나 졸리가 울고 갈 사격 솜씨와 현란한 운전 실력으로 현준을 구해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현준이 매번 살아남는 비결도 선화가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현준의 마음 속에는 NSS 동료 승희(김태희) 밖에 없지만 선화는 연적을 제거하기 위해 비겁한 술수를 쓰는 악녀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강렬한 눈빛으로 고독한 내면을 연기할 뿐이다.

'배우 김소연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소연 없는 선화는 상상할 수 없는데, 김소연은 드라마를 찍다가 인대가 끊어지고 12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당할 정도로 '독하게' 연기했다.

▶'구은재', '신애리' 독한 여자들의 복수 혈전

'비정상적 설정, 억지 전개'라는 비난 속에서도 40%대의 시청률을 올리며 안방극장에 '막장 드라마' 바람을 몰고 온 SBS '아내의 유혹'에도 무서운 여자들이 나온다. '아내의 유혹'은 바람둥이 남편과 시댁의 괄시에 소리죽여 울던 주부 캐릭터를 독하디 독하게 바꿔놓았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 정교빈(변우민)과 친구 신애리(김서형) 때문에 물에 빠졌다 살아난 구은재(장서희).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딴 여자가 돼 남편을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곤 애리를 향해 일갈한다. "내 남자가 그렇게 욕심났니? 불쌍한 인생. 그래, 남의 남자 뺏는 게 소원이라는데 가져가. 내가 버려줄 테니까 네가 주워다 써!"

너무 세게 나가다 보니 누가 나쁜 여자인지도 애매해졌다. 애리와 은재는 서로 뒤통수를 치며 나날이 표독해져 상대방을 응징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의 원인이 된 남편 교빈은 쪼그라든다. 애초에 이 똑똑한 여자들이 왜 이런 '찌질남' 때문에 싸웠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여자는 아니지만 SBS '시티홀'의 소도시 시장 신미래(김선아), 전통적인 내조의 개념을 넘어서 남편을 '매니저'처럼 관리하는 기술을 보여준 MBC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도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활 쏘며 전장을 누비는 여장부 '천추태후'

여성 캐릭터의 약진은 사극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인기 사극 '대왕 세종' '용의 눈물' '해신'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은 남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들은 임금을 차지하려고 궐내 여자들끼리 질투나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남자보다 훨씬 지적이고 총명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하는, 정치 할 줄 아는 여자 캐릭터들이 사극 보는 재미를 더했다.

KBS '천추태후'는 정사에서 요부로 묘사된 천추태후(채시라)를 거대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했던 걸출한 여성 정치인으로 재발견했다.

드라마 1회에서 여걸로 변신한 채시라는 직접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등 박진감 넘치는 연기로 시청률을 20%까지 끌어올리며 극 초반 분위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쟁과 권력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백성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북진정책과 영토회복을 고수하는 천추태후의 모습이 '태조 왕건'이나 '대조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시청률도 10%대로 곤두박질했다. 더구나 천추태후가 여걸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아들을 황위에 올려놓기 위해 문정왕후(문정희)와 대립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궁중 암투극과 다를 바 없어 드라마의 한계를 드러냈다.

천추태후는 극 후반부에 거란이 침공하자 다시 한번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서 세 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시청률을 반등시킨다. 비록 천추태후가 연인 김치양(김석훈)을 쳐내지 못하고 권신들과의 권력 투쟁에서도 패했지만, 고려판 '잔 다르크'로서의 매력은 충분히 발휘했다.

여성 리더십의 새 장을 연 '미실'. 출처 : MBC
여성 리더십의 새 장을 연 '미실'. 출처 : MBC
▶여성 카리스마의 진수, 정치가 '미실'

천추태후가 야심가 김치양과의 사랑을 어쩌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면,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연모(사랑) 따윈 날아가는 새나 줘버리라"고 할 정도로 비정하다.

신라시대 막후실력자 미실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무서워하게 만들라'라는 마키아벨리적인 정치가다. 고현정은 미소를 띤 모습으로 눈썹과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섬뜩한 악녀의 모습을 연기했다. 고현정의 연기에 감화된 일부 외국 누리꾼들은 그녀를 '페이스 댄서(face dancer)'라고 부르기도 했다.

극 중 미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행정을 장악한 세종과 군권을 거머쥔 설원랑이 미실의 남자이며, 화랑들은 그녀의 뜻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낭장결의(자결)를 한다. 왕후 자리에 집착한 미실은 진흥왕의 유언을 무시하고 진지왕을 왕좌에 앉혔다가 끌어내리고, 진평왕의 정실 마야부인을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미실이 끝까지 버리지 못한 여성성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버린 자식 비담(김남길)을 향한 '모성애'다. 미실은 비담을 처리하지 못해 결정적인 순간 덕만(선덕여왕, 이요원)에게 패하고 만다. 비록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라 부를 필요도 없고 네게 미안한 것도 없다"고 했으나 미실은 비담을 살리려 했고 비담에게 대의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사람이 목표인 것은 위험한 것"이라며 비담을 걱정했다. 미실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로 드라마 사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여성이길 거부하고 패도의 길을 걷는 '덕만'

여성성이 거세된 여성 지도자 '선덕여왕'. 출처 : MBC
여성성이 거세된 여성 지도자 '선덕여왕'. 출처 : MBC
"연모라… 참으로 따사롭고 한가한 말이구나." 서라벌 '엣지남' 비담의 애정공세에 선덕여왕 덕만은 이렇게 답한다. 미실의 시대가 가고 권좌에 오른 덕만은 제왕으로서 무서우리만치 냉혹한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그녀에겐 남편도 자식도 연인도 없다. 그래서 빈틈이 없다. 덕만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참으로 따분하고 메마른 일이지만 신라만을 연모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단순히 황실에 태어난 '쌍음'(여자 쌍둥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죽을 뻔한 덕만으로선 여성성을 버리는 것이 필연적일 수 있다. 모진 여왕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건 남성인 비담의 몫이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백제군을 앞에 두고 가야 부흥 세력을 직접 어르고 위협해 충성을 얻어낸 덕만은 춘추(유승호)를 왕재로 보고 주도적으로 정치 판세를 다시 짠다. 덕만은 최근 예고편에선 춘추에게 "비담을 척살하라"는 충격적인 밀명을 내리기도 했다.

위기마다 자신을 구하고, 오랜 세월 자신만을 바라봐온 '일편단심 민들레' 비담일 지라도 후계 구도를 흐린다면 가차 없이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왕좌를 위해 형제들을 죽인 조선의 태종 이방원을 보는 듯하다. 극중 덕만이 신임하는 유신(엄태웅) 역시 철저한 2인자를 자처하지 않았다면 언제 저 세상으로 갔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일찌감치 덕만의 재목을 파악한 사람은 고수인 미실이었다. "공주님께선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

여성성이 거세된 여성 지도자는 매력이 없다. 덕만은 시청자들로부터 '시베리아 벌판에 부는 바람보다 더 차갑다'는 원성을 듣고 있다. 그래서 '차서녀'(차가운 서라벌 여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영리한 덕만의 선택은 삼국 통일을 이룰 후대 왕들에게 많은 부담을 덜어준다. 궁지에 몰린 비담이 세를 규합해 난을 일으키지만 결국 실패하고 삼국 통일이 달갑지 않은 옛 귀족 무리와 역사 속에서 퇴장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여자, 덕만이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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