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미국드라마 ‘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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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9일 16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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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미국드라마 \'브이\'가 2009년 11월 다시 돌아왔다.
1983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미국드라마 \'브이\'가 2009년 11월 다시 돌아왔다.
애석하지만 이번엔 나이 타령으로 시작해야겠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 붉은 색 스프레이로 뿌려진 V를 봤을 때 가슴 좀 떨려주신 세대는 나이가 든 축에 속한다는 걸 구두조사를 통해서 알게 됐으니 말이다. ABC에서 11월3일 새 TV시리즈 '브이'를 방영한다고 했을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 심장의 박동이 나와 그 윗세대에나 적용된다는 점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너 '브이' 알아?"라고 물어봤을 때,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 TV안 봐요"하던 몇 살 어린 아랫집 남자의 대답에 적지 않게 놀랐다. 어떻게 '브이'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거 하나 모른다고 왜 이리 소란이냐고? 왜냐하면, '브이'는 내 생애 최초의 미드란 말이다. 그땐 미드란 말도 없었으니 추억의 외화라고 하면 되려나.

2009년판 '브이' 10점 만점에 11점

7년간 함께 해온 동료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발견한 에리카
7년간 함께 해온 동료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발견한 에리카
1983년 2부작 미니시리즈로 첫선을 보인 '브이'는 당시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브이: 최후의 전쟁'이라는 속편으로 만들어졌고, 그마저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이듬해인 1984년부터 2년 동안 NBC에서 TV시리즈로 정규 방영했다. 바로 그 TV시리즈가 1985년 한국에서도 안방극장에 소개됐는데, 그 역시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방영에 재방영을 거듭할 정도였다. 나보다 10여년은 연배가 많으신 선배의 회상에 따르면, "빨간 스프레이로 브이(V)를 그린 담벼락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니, 20여 년 만에 부활하는 '브이' 소식에 가슴 떨린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게 분명하다.

아닌 게 아니라 11월3일 첫 방영된 '브이'의 파일럿은 미국 방송가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최고의 파일럿이다. 10점 만점에 11점을 주겠다"는 'E!온라인'의 찬사를 비롯해, "소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에 충분하고, 다수의 취향에도 부합하는 대중성을 가졌다"는 등 호평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 호평은 1400만명이라는 시청자수를 기록함으로써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특히 초반 8분의 흡입력이 대단하다. 블록버스터 수준의 특수효과에, '천의무봉'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장면 간 이음새가 치밀하고 매끄럽다. 지진과 비행기 추락 등의 전초전 뒤에 거대한 우주선이 뉴욕의 하늘을 덮는 장면은 해마다 극장가를 찾아오는 재난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듯 했다. 솔직히 나는 그 장면을 극장에서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 지 상상했다. 두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면서 말이다.

만고불변 SF의 원형, 외계인의 지구 침공

서론이 길었다. 엄밀히 말해서 리메이크 '브이'가 새로울 건 없다. SF영화의 공식을 기억하자. 외계인은 언제나 침공과 약탈의 주체였지, 친구하자고 손 내미는 쪽은 아니었지 않은가. ('E.T'.는 예외다.) '브이'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의 외계인 지도자 애나는 "지구에 풍부한 미네랄과 물을 얻고 싶은데, 그 대가로 선진 기술을 알려주고, 불치병도 치료해주겠다"며 "평화"를 내세워 겸손하게 다가선다. 그렇게 뉴욕, 모스크바, 도쿄 등 전 세계 29개 대도시의 영공을 마음대로 정거한 우주선들은 지구인들에게 선의의 손길을 뻗어온다. 하지만 오리지널을 보지 않은 시청자들이라고 해도 이 외계인들의 꿍꿍이가 말하는 그대로가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브이'의 외계인들은 인간의 표피로 파충류인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친절과 평화로 위장한 의도 아래에 인육을 탐하는 본능을 감추고 있다. 오리지널에서 얇은 실리콘 마스크를 벗기면 초록 피부가 드러났던 것과는 달리, 2009년 리메이크에서는 제대로 만든 피부와 조직, 혈액이 있지만 위장이 얼마나 실감나든 간에 목적은 지구 침략이다. 외계인들은 우주선을 출현시키기에 앞서 동족들을 지구로 파견해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연구했으며, 이제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외계인 침투 정도는 피라미드로 치면 꼭대기인 국가기관에서부터 가장 밑바닥인 테러리스트로까지 이어진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저항군의 주축에 서게 될 FBI 테러전담반의 에리카는 우주선 출현에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도중 한 테러조직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을 발견하는데, 이는 브이들의 정체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외계인의 출현 뒤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그리게 된 카톨릭 신부 잭과, 외계인이지만 지구인의 편에 선 브라이언이 힘을 더할 예정. 드라마의 제목 '브이'도 중의적인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외계인들이 스스로를 "방문자(Visitor)"라고 칭한데서 붙은 별칭이고, 또 하나는 지구를 지키려는 저항군의 승리(Victory)를 뜻하는 브이다.

오마바 정권과 '브이'의 유사성

외계인과 우주선의 등장에 찬반으로 나뉜 사람들. 종교로 해답을 찾기도 한다.
외계인과 우주선의 등장에 찬반으로 나뉜 사람들. 종교로 해답을 찾기도 한다.
사실 '브이'에서 두 얼굴을 가진 존재는 외계인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오리지널 '브이'의 제작자인 케네스 존슨은 '브이'가 루이스 싱클레어의 소설 'It Can't Happen Here'에 기반했음을 밝힌 바 있다. 1935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대공황 속의 미국인들이 무력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독재정권을 자진해서 초대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브이'는 나치 정권이 어떤 수순으로 독일과 유럽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SF로 풀어낸 이야기였다.

SS친위대를 연상시키는 외계인들의 제복, 청년층을 가담시킨 세계 평화 사절단(히틀러 유스), 강력한 중앙집권형 권력, 능숙한 미디어 플레이 등은 1984년의 '브이'가 여러 층위를 가진 복잡한 텍스트로 읽히는 것을 가능하도록 했던 상징들이었다.

리메이크 '브이'의 흥미로운, 그리고 의미심장한 부분은 이 외계인들에게 현대적 의미를 부여해 새로운 상징으로 읽어내려는 미디어와 시청자들의 해석이다. 카리스마 있는 웅변술, 매력적이고 非미국적인 외모, 변화(Change)와 희망(Hopr)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점,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점, 젊은 세대의 압도적인 지지. 열거된 사항들은 TV비평가들과 블로거들이 꼽은 오바마 정권과 '브이'의 외계인들 사이에 보여진 (혹은 발견된) 유사성이다. 9·11 이후에 강화된 안보 의식이나 공공연하게 표출되는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 등 2009년의 미국이 마주한 현실에서 '브이'를 읽어내려는 이 같은 시도를 사실무근이라고 제쳐두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브이'의 제작진들은 이 같은 해석에 대해서 딱히 반기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상태다. 그러나 "JFK의 암살 당시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9·11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라며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언급하던 오프닝을 떠올려 볼 때 제작진이 보여준 소심한 발뺌은 설득력 없는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유니버설 헬스케어'라는 현 정권의 뜨거운 감자까지 등장시켰기에 "외계인이 나오는 TV시리즈로 봐달라"는 책임 프로듀서의 간곡한 부탁은 솔직히 김빠진다. 촘촘한 플롯, 블록버스터급의 규모에 더불어 현 정권에 대한 수사까지 더해진다면, '브이'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획득한 걸작의 대열에 오를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현재까지 에피소드 2편을 방영한 '브이'는 11월 동안 4편의 에피소드를 방영한 뒤 휴지기를 갖는다. 그리고 2010년 봄, 동계 올림픽 특별 시즌이 끝나면 방영을 재개해 그 뒤를 이어갈 예정이다. 총 13편으로 구성된 1시즌이 첫 회가 가져다 준 충격을 그대로 이어가려면 남은 2편에서 시청자를 충분히 설득하고 또 낚아야 함은 당연한 과제다.

제작보고회에서 발표된 바에 따르면 오리지널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장면들을 재생함으로써 오리지널에 대해 오마주를 표현할 것이라고 떡밥을 던져놓은 상태. 하지만 그 떡밥이 오바마 정권을 대놓고 이용하든, 혹은 그 무엇을 끌어들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 무엇이든 그 이상을 기대하고 싶은 마음은 '브이'의 리메이크에 가슴이 뛰었던 팬들일수록 더욱 간절할 테니 말이다.

안현진/ 잡식성 미드 마니아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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