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한국 영화, 칸을 넘어

  • 입력 2008년 5월 22일 02시 55분


1994년 4월 하순 나는 칸에 도착했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지휘를 맡고 있던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내한에 맞춰 파리에서 그와의 인터뷰를 마친 직후였다. TGV를 타고 칸에 도착해 숙소에 짐도 풀기 전에 달려간 곳은 칸 영화제 메인 극장인 팔레 데 페스티발이었다. 영화제가 열리기 2주 전쯤의 행사장 주변은 하얀색 텐트가 줄지어 세워져 있을 뿐 한적했다. 그러나 세계 예술영화의 자존심으로 거론되는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뛰었다.

한국 영화인에게 보내는 칸의 관심

귀국 후 기사를 쓰면서 행사장 앞 광장에 유명 감독과 배우들의 핸드 프린팅이 새겨진 것을 부러워하며 ‘이곳에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 등의 손도장이 사인과 함께 새겨질 날은 언제일까’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랬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제61회 칸 영화제(14∼25일)에 맞춰 다시 칸에 왔다. 칸 영화제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싶다는 기자로서의 숙원을 풀고 싶어서였다.

한국 영화는 1984년 제37회 때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물레야 물레야’가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칸과 첫 인연을 맺었고, 이어 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같은 부문에 초청을 받았다. 96년 양윤호 감독의 ‘유리’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고, 98년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감독주간’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단편 경쟁부문에서는 98년 조은령(작고) 감독의 ‘스케이트’가 처음으로 초청됐고,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이듬해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14년간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은 끊임없이 칸을 노크했고 최근 7, 8년간 칸은 한국 영화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표시했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장편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초청됐고, 2002년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차지했다. 2004년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2007년 전도연이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감독도 장편 경쟁부문 초청작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한국 영화는 최우수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제외한 주요 부문의 상을 대부분 수상한 셈이다. 올해도 칸은 봉준호 김지운 나홍진 감독 등을 각기 다른 부문에 초청해 한국의 젊은 감독들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나타냈다.

영화제 현장에서 이들의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이제 한국 영화의 ‘칸 콤플렉스’는 극복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해 경쟁부문 초청작품이 한 편도 없었지만 한국 영화계가 특별히 안타깝거나 섭섭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아니다. 확실히 한국 영화계가 그만큼 성숙했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제 출품이나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풍조가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은 이제 칸을 넘어 세계 영화의 본산인 할리우드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박찬호 박세리 최경주 박지성이 스포츠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박중훈 이명세 강제규 김윤진 비 등이 할리우드의 높은 벽을 두드리고 있다. 많은 유학생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재미교포도 가담하고 있다. 연출 연기뿐만 아니라 촬영 각본 조명 음악 미술 의상 분야에도 진출해 성과를 내야 한다. 대만의 리안 감독과 홍콩의 우위썬 감독, 청룽 리롄제 궁리 장만위 장쯔이 등 중국계 배우들이 이미 괄목할 만한 실적을 거뒀다.

자신감 갖고 할리우드로 나가야

칸 영화제에 11번째 온 평론가 전찬일은 “이제 한국 영화계는 영화를 예술성과 오락성의 대립구도로 놓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며 “칸을 넘어 세계 영화계에 도전장을 내려는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은 외국어 능력과 문화 전반에 대한 수준 높은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공동집행위원장도 “욕심 같아서는 누군가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꼭 한번 타줬으면 좋겠다”면서도 “한국의 전자 조선 철강산업이 세계시장을 휩쓸 듯 세계 10대 영화강국인 한국도 이제 칸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칸에서>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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