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 ‘음란서생’ 通! 왕의 여자와 간큰 스캔들

  • 입력 2006년 2월 16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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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란서생’은 풍자와 일탈의 미학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난데없이 비장한 순애보가 섞이면서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 영화는 ‘왕의 남자’ 이전에 사극으로 최고 흥행(358만 명)을 기록했던 ‘스캔들’의 시나리오(정확하게는 프랑스 작가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리메이크 작) 작가 김대우 씨의 감독 데뷔작으로 ‘왕의 남자’를 이을 사극 다음 주자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정작 시사회에서 뚜껑을 열어 보니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주인공은 조선시대 공맹(孔孟)의 도를 읊다가 당대 최고 음란소설 작가로 변신하는 선비 김윤서(한석규). 그는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지만 당쟁에 휩쓸린 동생이 모진 고문을 받고 와도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다. 어느 날, 왕의 후궁 정빈(김민정)에게서 자신이 소장한 그림이 가짜 같다며 범인을 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김윤서는 의금부 도사 이광헌(이범수)과 손을 잡고 사건을 추적하던 중 우연한 계기에 그릇가게 주인 황가(오달수)네 뒷방에서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음란소설을 접하게 된다.

그는 소일삼아 해적판 책을 읽게 되고 이 책이 왜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지 같은 글쟁이로서 고민하다 ‘꿈꾸는 것 같은 것, 꿈에서 본 것 같은 것,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 글의 진미’라는 저잣거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홀연 제도권을 탈출해 음란소설의 작가가 된다.

‘글’로 대중을 사로잡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뤄진다. 그림에 재주가 많은 이광헌까지 꼬드겨 ‘신묘망측’한 체위를 등장시키는 삽화까지 넣게 되면서 그의 소설은 일약 여인네들의 화제가 된다. 그러나 금지된 욕망의 덫에 걸려든 것은 그의 책을 찾는 독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점점 더 강한 성적 상상력에 덜미를 잡힌 윤서는 상상과 현실을 혼돈하면서 후궁 정빈의 난데없는 유혹에 넘어간다. 이제 윤서는 고리타분한 선비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멋진 작품을 쓰고 싶어 하는 예술가로 돌변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였다. 그가 인기 음란소설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관계가 들킬 것을 우려한 정빈의 계략에 말려 왕에게 덜미가 잡히고 혹독한 고문 끝에 섬으로 유배되는 것.

성이 난무하는 현대를 거슬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감춤과 내숭의 미학을 통해 인간 욕망의 실체를 해부하겠다는 당초 ‘음란서생’의 취지는 고비마다 인과관계가 흐트러지면서 흡인력을 떨어뜨린다. 그리하여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사회의 답답함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도덕의 이중성을 파고들며 양반사회라는 기득권층에 대한 풍자를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목숨까지 버리는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영화가 됐다.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횡행하는 폭력과 고문 장면도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해 겉돌고 만다.

품격과 학식을 두루 갖춘 사대부 명문가 양반이 갑자기 음란소설 창작에 재미를 느낀다는 전복적이고 전위적인 캐릭터가 ‘음란함’만큼이나 걸쭉한 풍자로 사회의 금기를 시원스레 무너뜨려 주길 바랐지만 이런 기대는 채워 주지 못했다. 가벼움 속에 숨은 촌철살인이라는 풍자는 고문 받는 윤서의 몸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23일 개봉. 18세 이상.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이 기사에는 본보 인턴기자 구민정(서울대 국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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