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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18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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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끝난 SBS ‘명랑소녀 성공기’의 한은정, ‘유리구두’의 김민선을 비롯, 현재 방송중인 SBS ‘라이벌’의 김민정, MBC ‘인어아가씨’의 장서희, KBS2 ‘러빙유’의 이유리 등 웬만한 드라마에는 빠지지 않고 악녀가 나온다. ‘악녀’를 내세운 선악 구도는 갈등의 극대화와 명쾌한 해소를 기본으로 하는 드라마 흥행 공식이기 때문. 1970년대 이후 시대상에 따른 드라마상 ‘악녀’들의 변천을 조명했다.》
1970년대 드라마의 단골 악녀는 시어머니였다. 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는 시어머니(박주아)가 며느리(태현실)에게 갖은 구박을 한다. 당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바보 아들 영구(장욱제)를 극진히 돌보는데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모함하는 등 ‘악의 화신’으로, 며느리는 불평한마디 없는 ‘천사표’로 그려졌다. 이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74년 ‘울밑에선 봉선화’도 시어머니(강효실)가 며느리(이혜숙)를 괴롭히는 연기는 모든 며느리들의 ‘공포’로 기억될 정도였다.
시어머니가 악녀 역을 도맡았던 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종속적 권력관계가 확고했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고 사는 세상이 됐지만 당시만해도 고부관계에서 시어머니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며느리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들어 고부갈등을 그린 드라마는 계속됐지만 시어머니가 ‘절대 악’으로 그려지진 않았다.
1990년대 후반들어 SBS ‘미스터 Q’(1998)의 송윤아, ‘토마토’(1999)의 김지영 등 커리어 우먼이 악녀 역할을 도맡았고 이는 2000년대 들어MBC ‘이브의 모든 것’(2000)의 김소연, SBS ‘수호천사’(2001)의 김지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회사 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재원으로 평가받는 인물. 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부하 여직원을 괴롭히며 한 남자를 놓고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들은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게, 여자 앞에서는 ‘여전사’다운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SBS 드라마국 구본준 CP는 “드라마 내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악행은 다소 과장됐으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성공하려면 몸을 무기로 하거나 ‘여전사’가 돼야하는 불합리한 세태’가 드라마에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드라마에 등장한 악녀들은 대체적으로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러빙유’의 이유리는 철저한 계산 아래 대기업 후계자에게 접근하고 ‘유리구두’의 김민선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벌의 가짜 손녀가 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21세기 악녀들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선은 싸늘하지만은 않다. 연기자들 사이에서도 악녀가 인기 캐릭터로 자리잡아 SBS ‘여인천하’의 도지원, KBS2 ‘겨울연가’의 박솔미 등이 악녀 역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선녀(善女)-악녀(惡女)의 이분법을 무너뜨린 분수령은 1999년 MBC 드라마 ‘아줌마’다. 권위적 남편에 맞서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갈채를 보냈다. 예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런 가운데 26일 시작하는 MBC ‘내사랑 팥쥐’도 ‘착한 여자〓콩쥐, 나쁜 여자〓팥쥐’라는 고정관념을 비딱하게 바라본다. 홍은희와 장나라는 콩쥐와 팥쥐로 대변되나 여기서는 오히려 콩쥐가 악녀다.
여성단체연합 조영숙 정책실장은 “TV에서 사랑과 일에 승부를 걸고 자아 실현에 강한 집착을 지닌 여성이 악녀로 그려져왔지만 시청자들의 의식은 한 발 앞서가고 있다”며 “‘아줌마’ 이후 악녀 드라마가 봇물을 이루는 것도 이런 사회적 변화를 뒤늦게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