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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14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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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이 기괴한 상황이나 설명만 늘어놓고 그 자체를 즐기는 ‘엽기’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관리 체제 하에서 생긴 시대적 산물. 감봉이나 해고, 생활수준 저하 등 교과서적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인터넷 패러디신문 ‘딴지일보’(www.ddanzi.com)가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엽기’가 서서히 수명을 다하면서 그 자리를 ‘주접’이 차지했다. ‘엽기적 살인사건’과 같은 극도로 부정적으로 쓰이던 ‘엽기’가 기괴한 재미로 해석되면서 사회적 의미가 변했듯, 추잡하다는 뜻을 지녔던 ‘주접’에 ‘메시지 있음’ ‘솔직함’ ‘원하는 바 있음’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영화’의 김정은은 지하철에서 종이컵에 토했다가 토사물을 다시 먹는 ‘엽기’를 뒤늦게 선보였다.
그러나 6월에 개봉 예정인 영화 ‘서프라이즈’에서 이요원은 ‘엽기’를 뛰어 넘는 ‘주접’이다. 그의 엽기적 행동은 의도가 분명한 탓에 엽기적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그는 친구의 애인역인 신하균을 파티에 붙들어 두기 위해 신하균의 목을 조르고 옷에 커피를 쏟는 예의에 어긋나는 ‘주접’을 발휘한다. MBC ‘뉴 논스톱’의 양동근이 허리춤에 숟가락을 차고 다니면서 태연하게 친구들의 밥을 퍼 먹는 것도 ‘먹겠다’는 의도의 표현으로 일종의 ‘주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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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애니메이션 사이트 ‘엔팝’의 최근작 ‘클릭클릭랩’의 ‘아줌마와 고삐리’편. 이 애니메이션에서 몸빼바지 차림의 아줌마는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발견한다.
자리에 앉으려는 고등학생을 핸드백으로 때리며 아줌마는 노동의 대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질타하는 랩을 한다. 밤샘 공부에 시달리는 피곤한 ‘고삐리’(고등학생)의 신세 한탄도 이어진다. ‘아줌마와 고삐리’에서 ‘아줌마’의 주접은 명예회복을, ‘고삐리’는 교육 문제를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화상 채팅에서도 주접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조금만 과장해도 상대에게 본인이 원하는 이상의 ‘주접’을 부릴 수 있다. 최근 화상채팅으로 만난 여자 친구와 사귀는 정모씨(28)는 “인터넷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는 요즘은 이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이 있을 수 없다”며 “정제되지 않은 표정과 말투, 생리 얘기도 하며 코도 후비는 솔직함 등 주접없이는 ‘작업’에 들어가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주접 바람을 우려하는 견해도 있다. ‘엔팝’의 강문주 PD는 “작품 제작에 ‘주접’ 테마가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작가들은 ‘주접’의 엽기처럼 사회적으로 크게 자리잡을 것이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며 “주접 바람은 엽기적 행동에 어떤 메시지와 솔직함을 담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수명과 인기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엽기(獵奇)[-끼] 기괴한 일이나 물건에 호기심을 가지고 즐겨 찾아다니는 것. ¶∼심/∼행각.
▼주접-스럽다[-쓰-따]<∼스러우니,∼스러워>음식에 대하여 추잡하게 욕심을 부리는 태도가 있다. 주접-스레
▼추잡[醜雜]☞추잡-하다[-자파-](말이나 행동이)더럽고 잡스럽다. ¶추잡한 짓/추잡한 음담패설.
<금성출판사 뉴에이스 국어사전>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