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연/日방송문화 개방 원칙 지켜라

  • 입력 2002년 2월 18일 18시 06분


MBC와 일본의 TBS가 공동 제작한 TV드라마 ‘프렌즈(Friends)’가 15, 16일 이틀간 MBC에서 방영되었다. 광복 이후 일본의 드라마가 우리 안방극장에 등장하기는 처음이며, 우리 방송사의 한일 합작 프로그램은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프렌즈’는 한국과 일본의 두 젊은이가 문화의 벽을 넘어 사랑을 이룬다는 스토리로, 신세대 취향의 멜로 드라마다. 감동적인 라스트 신과 함께, “이제부터가 힘들 거야.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는 마지막 대사는 양국의 젊은이들이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암시하고 있다.

‘프렌즈’ 방영 직후 지명관 한일문화교류자문위원회 위원장이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 위원장은 “우리 정부와 방송의 원칙 없는 일본 문화 수용 조치에 항의한다”며 16일 전격 사퇴했다. 그는 문화관광부나 방송위원회가 아직 공식적으로 개방되지 않은 지상파 TV에 어떻게 일본어가 그대로 나오는 드라마 방영을 허용했는지 알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MBC에도 유감을 표시했다.

▼정부-방송위 '프렌즈' 뒷짐▼

이에 MBC측은 “방송위로부터 일본 드라마가 아니라 한일 공동제작 드라마이기 때문에 방영해도 괜찮다는 유권 해석을 받았다”고 했다. 감독기관인 방송위는 “한일 공동제작 드라마여서 일본어 대사 유무를 판단하기보다 국민정서를 무시하는 지나친 일본색을 자제하라고 요구했다”며 일본색이 지나쳤다면 심의해서 제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방송문화의 개방 문제는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 출범 후, 1998년부터 3차에 걸쳐서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방송문화’의 개방문제 만큼은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의 방송문화가 국제화 세계화로 개방되어 가고 있는데, 오직 일본의 방송문화만 기피하는 정책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으로서는 무책임한 일이기는 하다. 특히, 월드컵 대회가 90일 이내로 다가와 정부나 방송위원회로서도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방송문화 개방을 마냥 연기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일이 촉박해도 정부 당국이 정한 정책이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우선, 정부는 ‘프렌즈’ 방영 이전에 가요의 경우처럼 일본의 방송문화를 한시적으로나마 개방한다는 선행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또, 감독기관인 방송위도 사전 조치로 최소한 한번쯤은 심의에 회부해 거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한일문화교류자문위원회도 이미 1월말부터 언론보도에서 MBC의 ‘프렌즈’ 방영 사실을 알았을 텐데, 사전에 논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프렌즈’는 한일 양국 방송사가 2년에 걸쳐서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전반은 일본이, 후반은 한국 스태프가 제작한 공동작품이다. 드라마의 내용은 다소 일본 만화적인 내용 구성과 우연성이 강조된 면이 없지 않지만 한일 양국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본 TBS의 홈페이지에는 17일 현재 122페이지에 걸쳐 시청자 수백 명의 의견이 쇄도해 재방영이나 비디오제작을 요청하는 등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중 상당수가 ‘한글을 몰라서 아쉽다. 이제 한글을 배우겠다.’ ‘원빈의 주소를 알고 싶다.’ ‘멋있는 한국인이다’라고 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많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배경도 홍콩으로 제3국을 택했는가 하면, 전후반을 나누어서 한일양국을 오갈 정도로 철저하게 상대국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내용도 상대국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쁜 감정이나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제작진의 노력이 상당히 엿보이는 작품이다.

▼시장개방 대비 전략 필요▼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서 원칙을 지키지 않고 일본어를 그대로 방영한 것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까지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국민감정을 더 철저하게 배려했더라면 이 작품의 의미는 오히려 더욱 두드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송문화 개방문제는 민족문화 정체성에 관련된 국가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는 성격 이외에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스케줄은 한일관계의 문제가 얽힐 때마다 협상 카드의 하나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양국 정부간에 합의한 대중문화 개방의 원칙과 스케줄을 스스로 제대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앞으로 한일간 문화교류는 점차 활발해지겠지만 원칙과 공론을 거치면서 이루어내는 자세를 잃어선 안될 것이다.

이연 선문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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