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한일합작영화 '고' '세상울타리 넘기'

  • 입력 2001년 11월 22일 18시 43분


나, 일본 도쿄에 사는 재일교포 3세 스기하라. 한국 이름 이정호. 싸울 때 가끔 옷 안에 숨긴 ‘현대조선혁명력사’라는 책으로 일본 불량배들의 주먹을 막곤 하지. 그렇다고 내가 ‘붉은 물’이 든 조총련계란 것도 아냐. 수백쪽 짜리 두꺼운 책이라 방패막이로 사용할 뿐. 나는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인처럼 사는 ‘코리안 재패니즈’. 누구라도 나보고 ‘재일 한국인’이라고 부르면 죽어!

그래서 나는 조선인 중학교를 나왔지만 일본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 난 거기서도 내 국적을 알리지않았어. 그런데 어느새 일본 친구들이 그걸 알고는 자전거 체인과 각목을 들고 덤비더라고. 전적은 24전 24승. 우리 아버지는 전직 권투 선수였고 난 어릴 적부터 코피 터져가며 싸우는 법을 배웠지.

그러던 어느날 나이트클럽에서 사쿠라이라는 일본 여자애를 만났어. 한눈에 서로 ‘필’이 꽂혀 그날로 연애했어. 그리고 ‘일’을 치르려는 그날 밤, 그녀의 옷을 벗기기 전 갑자기 내 국적을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제길,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언제 나라를, 색깔을 따졌다고. 어쨌거나 그녀는 돌아서더군. 자기네 아빠가 한국인하고 중국인 남자와는 연애하지 말라고 했데. 그냥 옷을 주워들고 내뺄 수 밖에.

한계인가봐. 내가 아무리 영화 속에서 “이건 분명 내 연애 이야기”라고 수없이 뇌까려도 내 스스로도 결국 이데올로기에 부딪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결국 일본 속의 한국을 찾으려 하지.

그래서 유달리 내가 아버지와 권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나 봐. 사실 말이 권투지, 아버지와 아들이 주먹질하는 게 스포츠냐? 나는 번번히 아버지에게 얻어맞는데, 아무리 내가 막나가도 아버지라는 벽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일본 속 한국인은 합법이라는 울타리 안의 어떤 ‘유리 벽’에 막혀있는 것 같아.

원작자인 가네시로 카즈키(金城一紀)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인데 나와 이력이 비슷해. 자기 얘기를 쓴 셈인데,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으로 지난해 일본에서 대중문학작품에게 주는 나오키 상을 받았어.

내 역을 맡은 구보쓰카 요스케(22)는 NHK 드라마 ‘한번 더 키스’(2001년) 등에 출연한, 요즘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아이돌 스타. 영화 내내 인상 벅벅 쓰며 사자후를 터뜨리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 초청돼 이 친구도 부산에 왔는데 영화와는 달리 약간 어수룩해. 특히 영화 속 긴 갈기머리를 빡빡 밀었던데, 영화찍고 느낀게 많아서 그랬다고 해. 15세 이상 관람가. 23일 개봉.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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