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여자」가 나왔을 때만 해도 여성 관객들은 유교적 가부장제의 틀을 깨는 주인공에게 소리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후 20년 세월. 올해 61세의 노장 임권택 감독은 96번째 작품 「창(娼)」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끝도 없이 타락한 세태를 함께 반성하기 위해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이번 추석 연휴에 선보이는 한국 영화들은 뒤틀린 욕망과 타락한 성윤리, 그에 따르는 「파멸」을 그린 작품이 유독 많다. 모두 5편의 한국 영화중 도시 젊은이들의 만남과 사랑을 그린 「접속」, 박중훈 주연의 코미디 「현상수배」를 제외한 3편이 세기말의 방종을 경고하고 있다.
최민수 강수연이라는 베테랑 연기자를 내세운 「블랙잭」은 광고 카피 그대로 「거칠고 자극적인」 미스터리 형태를 취한다. 중견 감독 정지영씨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이후 3년만에 만든 작품이다.
『이 세상은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성격의 형사 오세근(최민수). 범죄자들과 공모해 검은 이익을 취하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파이터다.
그가 여자를 만난다.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만족도 느낄 수 없었던 여자는 오세근에게 격정적 욕망을 분출한다. 이들의 무모한 사랑은 마치 어둠속을 질주하는 폭주족처럼 위험하기 그지없다. 파멸로 달리는 사랑.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지능 게임.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것인가.
강수연의 도발적인 섹시함과 도시의 하이에나를 연상시키는 최민수의 처절한 연기가 중년 관객들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듯하다.
「마리아와 여인숙」 역시 『세상은 불결한 여인숙 같은 것』이라고 감히 정의한다. 「대담한 성묘사와 그뒤에 숨겨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관객의 허를 찌르는 충격적 결말」로 일찍이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
바닷가 외딴 시골의 허름한 여인숙. 어릴때 머리를 다쳐 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지닌 기태(김상중), 어머니의 불륜 때문에 정상적 인간관계에 회의를 가진 기욱(신현준) 형제가 여인숙의 주인이다. 단조롭지만 평화롭던 이들의 생활은 끈적이는 가요 「갈대의 순정」과 퍼런 소주에 취한 명자(심혜진), 그 딸 마리아(이정현)가 나타나면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빠진다. 형제 사이를 가로지르며 욕망과 이성을 저울질하는 운명의 추명자….
「씨받이」나 「아다다」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보수적 제도속에 짓눌려 죽음을 맞던 여성들이 최근의 영화에서는 먼저 유혹하고 종말을 재촉하는 욕망의 화신이 되어 나타난다. 반면 임권택 감독의 「娼―노는 계집 창」은 짓밟히는 여성에 대한 연민이 배어있는 작품. 고아로 창녀촌에 발을 들여놓은 방울(신은경)을 주인공으로 70∼90년대 창녀촌 여성들의 삶과 사회 변화를 그렸다. 첫발을 잘못 디딘 방울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연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