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걱정 직장인 필독 레시피] 34년 사무직에서 소방안전관리자로
대기업 퇴직 후 수십 곳에 이력서, 답신 ‘0’… 확 다른 노동시장 환경
중장년내일센터 상담과 조언받아…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 도전 성공
전기기능사도 따서 작년에 취직해
새벽 공부와 커피 한잔 루틴 삼아… 가장 큰 죄는 남는 시간 낭비하기
이건주 씨가 소방안전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오피스텔 방재실에서 수십 개의 폐쇄회로(CC)TV 모니터를 통해 소방안전 시스템을 관리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대기업 사무직으로 34년 근무한 뒤 은퇴한 그는 중장년내일센터를 찾아 상담받은 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성남=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지난해부터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오피스텔 방재실에서 소방안전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이건주 씨(63)는 2023년 말 은퇴한 뒤 이듬해 4월 중장년내일센터를 찾은 게 ‘신의 한 수’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참여하게 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시간은 단순한 구직활동을 넘어 삶을 다시 설계하는 기회가 됐다. 대기업에서 30년 넘게 일한 터라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라는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지만, 연락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퇴직 후의 노동시장은 전혀 달랐다.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자신의 근무 경력에만 매달리지 마라
이 씨는 1990년 동부건설에 입사해 재무 업무를 맡았다. 회사가 발전 사업에 뛰어들면서 신설 법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발전 사업이 다른 기업으로 매각되면서 일순간 일자리를 잃었다. 한 달간의 공백 끝에 포스코에너지 자회사 삼척블루파워로 이직했다. 발전 업무로 7년 일한 것을 인정받아 경력직으로 채용됐다. 당시 한국전력 출신이 아니면서 발전소 관련 업무 경험자가 드물었던 터라 복수의 추천을 받아 입사할 수 있었다. 삼척블루파워에서는 서울에서 5년, 강원도 삼척에서 4년을 근무했다. 삼척에서는 투자 규모 4조5000억 원에 달하는 대형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3년 12월, 그룹장 직급으로 34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쳤다.
● 상담사의 권유가 새로운 길의 첫걸음
경기중장년내일센터 상담사는 이 씨의 경력을 보고 얘기를 나눈 뒤 소방안전관리자에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이 씨가 건설 관리를 하며 기술자는 아니지만 전기 및 화재 예방 등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게 포인트였다.
한국소방안전원에서 운영하는 소방안전관리자 과정은 2주간 의무 교육을 이수한 뒤 마지막 날 시험을 보는 방식이다. 합격률은 약 30%. 정원이 제한돼 있어 여러 차례 신청에 실패한 끝에 2024년 7월 말 겨우 자리를 잡았고, 8월 초 시험에 합격했다. 이 씨는 “소방은 저하고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기 살기로 집중하니까 됐다”고 회상했다.
자격증을 따고 난 뒤에도 취업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실업급여가 끝날 때쯤 채용 박람회에 나가봤지만 보이는 건 노인 일자리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직업훈련원 직원이 나눠주는 전단을 받았다. ‘자리 세 개 남았으니까 전기기능사 과정 신청하세요, 무료입니다.’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해 4개월간 약 400만 원 상당의 교육을 전액 무료로 받았고, 지난해 4월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한 달 뒤 소방안전관리자로 취직했다.
● 소방안전관리자란?
소방안전관리자는 ‘화재의 예방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이나 시설에서 화재 예방과 안전관리를 전담하는 일을 한다. 단순히 불을 끄는 역할이 아니라, 화재로부터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 전체의 소방 안전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다. 법적으로 반드시 선임해야 하는 직책이므로 사회적 수요가 꾸준하며, 화재 안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소방안전관리자는 관리하는 대상물의 규모와 위험도에 따라 등급이 특급과 1∼3급으로 나뉜다. 특급은 50층 이상 또는 지상으로부터 높이 200m 이상인 아파트, 전체 면적 20만 ㎡ 이상의 특정 소방대상물 등 초고층 및 대형 시설을 담당한다. 1급은 전체 면적 1만5000㎡ 이상의 건물, 11층 이상의 아파트(특급 제외), 가연성 가스 1000톤 이상 저장 및 취급 시설 등 대규모 시설을 관리한다. 2급은 스프링클러 설비 또는 물 분무 등 소화설비가 설치된 건물, 옥내소화전 설비가 설치된 시설 등 중간 규모의 대상물을 담당하고, 3급은 자동화재탐지설비가 설치된 비교적 소규모 건물을 관리하며 진입장벽이 가장 낮다.
● 소방안전관리자가 되는 방법
자격을 취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이미 소방 관련 국가기술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면 별도의 교육이나 시험 없이 소방안전관리자가 될 수 있다. 소방기술사, 소방시설관리사(이상 특급 및 1급), 소방설비 전기·기계 기사(1급), 소방설비산업 전기·기계 기사(2급), 위험물기능장 및 위험물산업기사(관련 시설) 등이 있다. 이런 자격증을 보유한 경우 더 큰 규모의 시설을 담당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처우도 더 좋다.
이 씨처럼 관련 자격증이 없는 사람은 한국소방안전원에서 실시하는 강습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소방안전관리자가 될 수 있다. 자격시험 응시 조건은 특급은 소방 관련 실무 경력이 있는 사람 중 강습 교육 40시간을 이수하면 된다. 1급은 소방 관련 실무 경력이나 학력 요건이 충족한 사람 중 강습 교육 40시간을 이수하면 된다. 2급은 강습 교육 32시간 이수, 3급은 강습 교육 16시간 이수로 가능하다. 자격시험은 소방관련법규(소방기본법, 소방시설법, 위험물안전관리법 등)와 소방안전관리 실무(화재예방, 초기대응, 소방시설 관리) 2과목으로 100점 만점 중 한 과목 40점 이상, 전 과목 평균 7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자세한 정보는 소방안전원 홈페이지에 있다.
● 어떤 일을 하나?
이 씨는 출근하면 가장 먼저 전임 당직자와 인수인계를 하고, 전기·기계·소방·급수·난방 등 5∼6종의 업무 일지를 작성한다. 오전 9시와 오후 9시 두 차례 지하 기계실로 내려가 설비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변압기 온도가 올라가면 팬을 가동해 냉각시키고, 스프링클러 교체 시에는 외국인 작업자들과 소통하며 밸브를 잠그고 물을 빼는 작업을 조율한다. 소방 담당인 만큼 건물 구석구석 먼지 적체 여부나 쥐 출몰까지 체크한다. “쥐가 전선을 갉아 합선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끈끈이를 놓아서 한 마리 잡기도 했다”고 했다.
현장 상태 점검을 한 뒤엔 방재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영상으로 감시한다.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올라오는 정보를 체크하고 혹 이상이 있으면 바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이 씨는 현재 월 300만 원 수준의 급여에 퇴직연금을 더하면 노후 생활비로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이 씨는 “주간-24시간 당직-비번의 형태로 근무하고 비번일 때는 24시간 쉬는 시스템이라 시간이 많다. 근무하면서도 오후 9시 이후엔 개인 시간이다. 맘만 먹으면 공부할 시간이 많다”고 했다.
● 공부가 노후 인생을 좌우한다.
이 씨는 새벽 4시 전후에 눈이 떠진다. 자명종 없이도 몸이 알아서 일어난다. 가족이 자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가방을 챙겨 나와 24시간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2시간가량 공부한다. 이것이 하루를 버티는 핵심 루틴이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그때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응원할 수 있다”고 했다.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다 지하 방재실 근무자가 됐을 때 자존감이 흔들리기도 했다. 지인들이 방재실에서 근무하는 그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버지였다고 했다. 이 씨는 “아버지께서는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하시고 바로 경비 일을 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셨다. 그때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 씨는 스스로 다독이는 루틴, 즉 새벽 공부와 커피 한 잔의 시간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 코로나19가 만들어준 공부 습관
이 씨는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할 때 사이버대학교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사회복지학과 경영학을 공부했다. 행정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땄다. 처음에는 경영학 학위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소방안전관리자 기사 시험 응시 자격을 얻는데 이 학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사 자격증을 획득하려면 관련 학위나 경력이 있어야 한다. 그때 딴 학위 덕분에 바로 기사 자격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회복지학 공부는 봉사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삼척에서 근무할 땐 퇴직 직전 2년간 회사의 사회공헌 신규팀 업무를 맡아 봉사단을 꾸려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구축했었다. 체계적인 운영 덕에 보건복지부 장관상과 강원도의회 의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분당 우리교회의 ‘긴급구호뱅크’ 상담 봉사자로 활동 중이다. 동사무소에서 의뢰한 복지 사각지대 독거노인을 직접 방문해 면담하고, 보증금 지원 등 행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급박한 문제들을 교회 기금으로 해결하는 역할이다.
이 씨는 인터뷰 마지막에 영화 ‘빠삐용’을 언급했다. “빠삐용에서 주인공의 죄목은 ‘인생을 낭비한 죄’였습니다. 퇴직자에게 가장 큰 적은 남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뇌는 80세까지 계발됩니다. 저는 지금 신입사원입니다. 신입사원은 열심히 배워야죠. 퇴직을 앞둔 여러분, 미리 준비하면 미래는 충분히 개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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