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자율주행, 흘러가는 골든타임] 〈하〉 한국, 더 늦으면 기회 없다
“배울게 있으면 누구에게든 배운다”… 현대차, 하반기 광주에 200대 투입
쏘카-크래프톤, 1500억 합작법인 준비
“겹겹 규제 여전, 지원 조직도 산재… 선진국 따라잡을 컨트롤타워 필요”
“테슬라와 웨이모 같은 미국 기업과 중국이 굉장히 잘하고 있다. 모자란 기술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전 세계 어느 회사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겠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14일 서울 서초구 헌릉로 현대차그룹 양재사옥에서 진행한 타운홀미팅에 앞서 기자들의 자율주행 관련 질문에 이같이 말했다. 시장에서는 정 회장의 발언에서 현대차그룹의 달라진 자율주행 전략이 엿보인다는 평가다. 정 회장이 직접 1월 CES가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찾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는 등 최근 현대차는 인공지능(AI) 기업과의 협업이나 합작 등에도 적극적으로 ‘문’을 열고자 자율주행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일단 똑똑한 자율주행 두뇌부터 확보하고, 미국과 한국에서 실증해 데이터를 쌓아야 자율주행 상용화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 현대차 광주에 자율주행차 대거 투입, 모빌리티 기업들도 ‘잰걸음’
광주시 전역이 자율주행 실증무대가 될 예정인 가운데 이곳을 달리게 될 현대차 아이오닉5 기반 실증차량의 전시 모습.
최근 자율주행 시장이 급성장하며 세계 곳곳에서 상업화 단계에 들어서자 한국 기업들의 마음도 급해지고 있다. 피지컬 AI 시대의 ‘핵심 전장’인 자율주행 시장이 미국과 중국 기업들의 차지로 넘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글로벌 조사기관 CMI에 따르면 세계 자율주행 시장은 2025년 2932억 달러에서 2032년 3조1050억 달러(약 4300조 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절치부심에 나선 현대차에 광주시는 중요한 시험 무대가 될 전망이다. 지난달 광주시는 시 전체 도로가 자율주행 실증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동안에는 일부 지역이나 제한된 도로에서 ‘레벨4(감독자 없이 자율주행이 가능)’ 수준의 자율주행차가 제한된 시간에만 운행됐다. 국내에서 광역시급 대도시의 도로 전체에서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차가 운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차그룹은 이에 따라 광주에 하반기 중 자율주행차 200대를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카메라 8대와 레이더 1대를 조합한 자율주행차다. 기존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에 레이더나 적외선 센서를 중심으로 활용하던 현대차그룹은 최근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카메라를 도입하면서 전방 충돌 방지 보조 기능 등 안전 사양의 성능을 크게 높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 실증 자율주행차에는 자체 개발한 자율주행 체계인 ‘아트리아(Atria) AI’도 탑재된다.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 기업 포티투닷은 ‘아트리아 AI’를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영상을 지난해 12월 공개한 바 있다. 당시에는 “테슬라에 비해 아쉽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그 이후에도 기술력을 끌어올려 왔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특히 광주 실증 사업을 통해 많이 달리면 달릴수록 아트리아의 품질이 개선될 수 있다는 자신이다.
여기에 현대차는 엔비디아 부사장 출신 박민우 사장을 포티투닷 대표 및 첨단차량플랫폼(AVP)본부장 사장으로 영입하는가 하면,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모델 ‘알파마요’도 적극 채용하기로 했다.
모빌리티 진영도 잰걸음이다. 카셰어링 업체 쏘카는 방대한 데이터 자산과 자동화 기술을 무기로 국내 자율주행 생태계 구축에 뛰어들었다. 전국에 깔린 쏘카 카셰어링 차량 2만5000대는 하루 평균 110만 km를 달리며 주행 영상과 사고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쏘카는 이 데이터를 발판 삼아 게임사 크래프톤과 손을 잡고 1500억 원 규모의 합작법인 ‘에이펙스 모빌리티’를 이달 중 출범할 예정이다.
● 뒤엉킨 규제, 컨트롤타워 부재는 ‘과제’
오토노머스에이투지는 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자율주행택시 사업에 참여하는 등 해외 무대에 적극 도전하고 있다. 사진은 실증 사업에 투입됐던 레벨4 시스템이 탑재된 아이오닉5 차량.다만 아직 국내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자율주행 시장에서 몸집을 키우기엔 과제가 적지 않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한국의 자율주행 기술 수준은 89.4점으로 미국(100), 유럽연합(98.3) 중국(96.4), 일본(89.7)에 이어 5위권으로 평가되지만 시장 규모는 10위권에도 이르지 못한다.
자율주행 업계는 시장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키워 나갈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토부와 산업통상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경찰청까지 자율주행 관련 지원 부서와 규제 조직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2024년 발간한 ‘4차 산업혁명 대응 점검 감사보고서’에서 “신기술 도입 과정에서 부처 간 이견으로 정부의 의사 결정이 장기간 지연되면서 기술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19년부터 국토부와 과기정통부가 자율협력주행시스템 통신기술 표준 방식 결정을 두고 이견을 보여 4년간 시간을 허비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2023년 발간한 ‘국내외 자율주행자동차 관련 입법 동향과 쟁점 분석’ 보고서에서 “운전을 담당하는 자율주행시스템은 자동차관리법에, 운전자의 역할과 책임은 도로교통법에 담겨 있다”며 관련 법령 간 연계성을 살펴 정비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규제가 부처별로 겹겹이 쌓이고 부처 간 협업도 잘 안되니 사각지대도 많다”며 “자문위원회 정도로는 선진국 자율주행 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각 부처에 ‘이 정책은 이렇게 개선하라’고 주문할 수 있는 대통령 직속기구 같은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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