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인워크아웃(채무조정)’을 통해 9만 명이 넘는 이들이 1조7000억 원에 육박하는 원금을 감면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2년 개인워크아웃 제도가 도입된 이후 원금 감면을 받은 사람 수도, 금액 규모도 역대 최대 수준이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S(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되는 가운데 취약 계층을 중심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이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9만3366명이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활용해 총 1조6713억 원어치의 원금을 감면받았다. 이는 1년 전보다 18.2% 늘어난 규모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직후인 2020년과 비교하면 57.8% 증가했다. 개인워크아웃으로 빚을 탕감받은 이들의 숫자 자체도 2023년보다 7.6% 늘었다. 1인당 감면받은 금액은 평균 약 1790만 원이었다.
개인워크아웃이란 신용카드 대금, 대출금 등이 3개월 이상 장기 연체된 사람에게 채무상환을 지원하는 제도로 신청자를 대상으로 신복위가 선정한다. 신복위의 채무조정 대상자로 확정되면 원금, 이자 등의 감면을 받게 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내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최근 들어 원-달러 환율까지 급등해 물가도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더욱 안 좋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대 개인워크아웃 4년새 2배로… 사회 나오기도 전 ‘빚수렁’
작년 개인워크아웃 1.7조 역대 최대 취업난속 학자금-생활비 대출 늘어… 20대 감면액 증가율 全연령서 최고 60대 이상 감면 총액도 90% 늘어… “취약계층 채무조정-재기 지원을”
경기 시흥시에서 홀로 거주 중인 최모 씨(26)는 2년 전 서울 소재 대학 전자공학과에 뒤늦게 입학했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아르바이트만으로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려워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저기서 급전을 빌리며 가까스로 버티다 빚이 2000만 원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결국 그는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고, 대학 졸업 때까지 부채 상환을 잠정적으로 유예했다.
최 씨는 “현실적으로 빚을 갚는 게 도무지 어려워 포털을 찾던 중 신복위의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알게 됐다”며 “더 나은 삶을 살아보자고 선택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상황을 더 힘들게 만든 것 같다”고 토로했다.
개인워크아웃 신청-감면액 추이 자료: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실, 신용회복위원회9일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실에 따르면 개인워크아웃 원금 감면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2020년에 1조592억 원을 기록한 이후 가파른 증가세를 보여왔다. 코로나19 국면을 대출로 연명해 왔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중에서 빚을 갚기 힘든 ‘한계 상황’에 내몰린 이들이 늘어난 결과다. 지난해에는 1조6713억 원으로 2002년 개인워크아웃 제도가 도입된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고금리·고물가 국면이 오랫동안 지속됐다”며 “대출로 버텨온 소상공인들이 직격탄을 맞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인워크아웃 신청-감면액 추이 자료: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실, 신용회복위원회문제는 20대 이하, 60대 이상의 취약계층 중에서 개인워크아웃 문을 두드리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이하가 감면받은 총액은 2020년 529억 원에서 지난해 1070억 원으로 4년 사이 약 102% 증가해 모든 연령층 중에서 가장 높은 증가 추이를 보였다. 60대 이상의 원금 감면 총액도 2020년 1372억 원에서 지난해 2602억 원으로 약 90% 늘어나며 20대 다음으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20대 이하의 이 같은 상황은 사회에 진출하기 전 단계부터 ‘빚의 수렁’에 빠진다는 점에서 문제다. 60대 이상은 노후 빈곤으로 이어질 단초가 될 수 있다.
서범수 의원은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 이들의 재기를 위한 신용회복 지원도 필요하지만, 이들이 애초부터 워크아웃에 이르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금융-통화당국도 취약계층 예의주시
정부 당국은 고금리·고물가 장기화 국면에서 취약계층의 부실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취약층, 청년층, 미취업자 등에 대한 맞춤형 채무조정 지원안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70세 이상 고령자와 개인워크아웃을 이행 중인 청년에 대한 감면 정책을 추가로 실시하며 ‘핀셋 관리’에 나섰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12월 30일 발간한 ‘하반기(7∼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취약계층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신용점수가 낮고 소득이 적은 대출자들이 최근 들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한은은 “전체 자영업자 대출은 둔화됐지만 연체율이 상승세고 저소득·저신용 차주가 급증한 상황”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회생 가능성이 낮은 일부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채무조정과 재기 지원을 병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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