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가 입찰제, 철도차량 품질 저하-안전사고 증가로 이어져”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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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기술점수 평가 탈락 사례 없어… 제작 능력 부족으로 납기 지연 빈번
가격 출혈경쟁 향한 비판 목소리 증가
업계 “입찰 제도-평가 기준 개선 필요… 철도산업 발전-국민 안전 최우선해야”

KTX-이음. 현대로템 공식 블로그 캡처
KTX-이음. 현대로템 공식 블로그 캡처
《최근 수도권 전철 1호선에서 발생한 전동차 화재 및 고장 등 열차 사고로 인해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종합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한 철도차량 공급을 위해 가장 적합한 계약자 선정이 아닌 최저가 기준으로만 업체를 선정해

저가 부품 사용과 출혈경쟁을 조장하는 현행 철도차량 입찰 방식이 문제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18일 오전 서울 지하철 1호선 도봉역에서 승객 400여 명이 타고 있던 열차가 고장으로 멈춰 섰다. 이로 인해 뒤따르던 열차 9대의 운행 시간이 최대 40분간 지연됐다. 이날 도봉산역에서는 또 다른 열차가 고장 나면서 후속 열차 9대가 15분∼1시간가량 지연 운행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지난달 13일엔 1호선 인천역에 들어서던 전동차 두 대에서 연기가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14일에는 수인분당선 열차 3대가 잇따라 고장이 났고 15일에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일산선 열차가 정전돼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서울 지하철 열차 고장 사고는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철도 사고 및 운행장애 건수가 2020년 두 자릿수를 넘어서면서 시민들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최근 사고 빈도는 2019년 7건에서 2020년 10건, 2021년 22건, 2022년 17건으로 높아졌다. 2018년 이후 최저가 입찰제로 수주 경쟁에 뛰어든 중소 철도차량 제작 업체의 전동차가 본격적으로 납품이 시작된 후부터 사고가 늘어난 것이다.

늘어나는 철도 사고… 새로 도입한 전동차 사고 빈발

전국철도노동조합은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수도권 전동차 화재·고장 등 사고와 관련해 근본적인 안전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성명서를 공개하고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 측은 “최근 유사한 사고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신형 전동차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지시·감독하고 사고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사고 차량의 운행을 제한하거나 중단하라”고 철도공사에 요구했다.

노조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9일부터 열흘간 신형 전동차의 화재 사고 등은 총 20건을 넘는다. 지난해 11월 신형 전동차 7개 편성이 열차 하부에서 화재가 발생하거나 보조전원장치(SIV)에서 고장이 발생했다. 일부 전동차는 운행 도중 지하 구간에서 단전이 발생해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끔 했다.

사고가 빈번한 것으로 지목된 신형 전동차는 A 제작사에서 2022년 8월 초도 편성을 납품한 후 순차적으로 영업 운행 중인 차량이다. 1호선에 41개 편성을, 일산선(3호선)에 8개 편성을 도입하는 차량이다.

한 회사의 전동차에서 비슷한 형태로 안전사고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노조 측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새로 도입된 전동차에서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는 상황”이라며 “심지어 사후관리 규정에 따라 제작사 차량을 수리했는데도 또다시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사고로 인해 차장 등 승무원은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형 사고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 속에서도 사고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시민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사고는 서울교통공사에서도 있었다. 지난해 9월 2일 과천선 평촌역에서 신조 전동차가 차량 하부 연기 발생으로 18분간 지연 운행했고, 지난해 12월 18일 3호선 수서차량기지 유치선(S10선)에서 유치 중이던 신조 전동차인 347편성의 이상 징후 발생 점검 중 3748호 냉난방 배전반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화기로 진압했다.

부산교통공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열차 67%가 교체 대상인 노후 차량으로 영업 운행 중인 부산 도시철도 1호선에서 최근 운행 도중 열차가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2월 2일 부산 1호선에 투입된 신조 전동차는 오후 5시 45분 서면역에서 출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출력 저하 현상으로 승객 150여 명이 하차했고 열차는 약 6분 지연됐다. 또 지난 2월 11일 오후 8시 20분 부전역에서 서면역으로 출발하려던 열차가 멈췄다. 해당 열차는 도입된 지 36년이 경과한 노후 전동차다.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신조 전동차 사고의 공통점이 2018년 이후 최저가 입찰제를 통해 수주한 전동차인데 발주 기관은 사고의 심각성을 외면하면서 오히려 정당화하려고 한다”라고 꼬집었다.

새롭게 도입된 차량이 기존의 영업 운행 중인 레일 조건에서 정상 운행하기까지는 일정 기간 적응 기간이 필요해 투입 전 상당 기간 시운전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투입된 신조 전동차들의 잦은 사고는 설계부터 제작, 납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친 전동차라고 보기 어렵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충분히 예견되는 현상에 대비한 안전 설계를 하지 못한 제작사의 설계 기술 능력이 문제”라며 “철도안전법의 법적 규정대로 시험을 마쳤지만 이는 최소한의 법적 요건일 뿐 완벽한 성능과 수명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계약자가 설계 능력 등을 발휘해 최선의 제품을 공급했는지, 발주자의 관리·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확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전했다.

노조-업계 한목소리로 “‘최저가 입찰제’가 문제” 조속한 변화 절실

노조는 신형 전동차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이유로 ‘최저가 입찰제’를 꼽는다. 국내 기업들도 철도차량 품질 저하와 안전사고 증가와 관련해 해당 제도 문제를 지적해왔다. 철도업계 각층에서 입찰 제도를 동시에 성토하는 모습이다.

국내 철도차량 제작사는 국가계약법과 지방계약법 등에 따라 2단계 입찰 방식으로 선정된다. 이 방식에서는 기술평가에서 85점 이상을 받으면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가 수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국내 전동차 입찰 과정에서 기술점수를 충족하지 못해 탈락한 사례는 없었다. 그에 반해 수주 이후 계약 이행 과정에서 설계 능력, 제작 능력 등의 부족으로 거듭 납기 지연 문제를 일으켰고 납품 단계인 최근에는 각종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현행 입찰 제도가 제작사의 능력을 평가하기보다는 가격 출혈경쟁만을 부추기는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발주처가 예산 절감을 목적으로 가격경쟁을 유도하는 현 철도차량 구매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입찰 구조상 출혈경쟁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결과적으로 철도차량 및 부품사의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품질 저하와 철도차량 산업 자체의 부실로 연결된다. 최저가로 낙찰받은 업체의 경우 원가를 맞추기 위해 값싼 해외 부품 사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국내시장에서 철도 기술 발전에 기여해 온 중소 부품업체의 생존은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철도차량은 선로별로 각각 운영 조건이 모두 달라 철도 운영자의 요구에 맞춤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중후 장대형 다품종 소량 생산 방식’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라고 전하며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입찰자가 해당 철도차량을 수주하는 때부터 수명 주기가 끝날 때까지 운영자에게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손실을 줄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10월 17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국가시설공단과 철도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김학용 의원은 국토교통부 철도국장에게 “최근 5년간 납기가 지연된 열차는 1099량으로 총 1812량이 제때 도입이 불가하다”며 “이는 납품 능력이 부족한 업체들이 최저가 입찰제로 계약을 따내는 입찰 방식의 문제로 이에 대한 제도 개선 방안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같은 달 26일 국토교통부(철도공사)는 ‘3개 회사 중 2개 회사가 연간 제작 가능 물량 초과 수주는 사실이며 시장 선점을 위해 일단 발주부터 받는 사례가 빈번했다. 제작사 의견 청취 후 진단 용역을 통해 합리적인 낙찰자 결정 방식과 평가 기준을 확립할 예정’이라는 요지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한 철도 관계자는 “이는 여론을 의식한 보여주기일 뿐 제도 개선 의지가 없어 보인다”라고 꼬집었다. 또 “제작사는 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다르고 각 제작사의 수주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표할 것”이라며 “현재 철도차량 입찰 제도 변경의 가장 큰 목표는 발주 기관이 요구하는 제품을 제대로 된 성능과 품질로 제때 공급받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도공사는 간담회 시행 후 전문 기관에 진단 용역을 맡겼다. 이 전문 기관은 지난 1월 9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고속 차량의 경우 ‘협상에 의한 계약’ 적용이 필요하고 전동차 및 일반 차량은 기술평가 변별력 확보를 위해 종합심사제 및 제작 여유율 평가와 같은 적격 심사의 평가 기준 도입이 필요하다”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철도공사는 올해 2월 ‘2024년 철도차량 구매 방침 수립 결과’를 국토부에 보고하면서 고속전철을 포함한 올해의 모든 입찰을 이전과 같은 최저가 입찰로 진행하기로 보고한 뒤 제도 개선을 위한 2차 진단 용역을 6월 5일까지 받기로 하고 두 번째 용역 계약을 같은 기관에 발주했다.

철도공사의 올해 구매 계획에 따르면 ‘KTX-이음’으로 불리는 260㎞/h급의 고속전철 78량을 4월에 입찰 공고할 예정이다. 이어 일반 철도 EMU-150 전동차 116량 등 총 1조2670억 원에 이르는 철도차량 발주가 예정돼 있다.

KTX-이음 고속전철은 국책연구과제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해 국가 핵심기술로 선정된 국내 유일의 기술 보유 제작사가 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고속전철에 한참 못 미치는 150㎞/h급 전동차의 경우 2018년 150량과 2019년 208량을 최저가로 수주한 B 업체가 1년의 납기 연장을 받고도 능력 부족으로 계약 이행이 지연되다가 최근에야 납품이 되고 있다. 이마저도 잦은 고장과 사고로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철도공사가 저가 경쟁을 유도하면서 기술 보유 제작사를 배척할 뿐 아니라 기술 능력이 부족한 후발 업체를 끌어들이려 한다. 현행 제도가 빨리 개선되지 못한다면 국가 핵심기술이 철도차량 분야에서 제대로 사용되지도 못하고 사장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철도공사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둬야 하는 만큼 올해의 구매 입찰은 2차 용역이 완료된 후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토교통부는 올해에 구매하는 철도차량은 철도공사의 진단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입찰 제도를 재정립한 후에 발주하도록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술평가의 중요성 대두

업계에선 입찰 제도의 개선과 함께 평가 기준과 이를 운용하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현재까지 철도차량 구매 입찰에서는 입찰 전 ‘사전규격공개제도’를 통해 입찰 서류를 공개해왔다. 발주자가 요구하는 철도차량의 규격과 입찰 절차 등에 대해 해석상의 오류·오해로 인한 입찰 과정에서의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하지만 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유독 평가 기준에 대해 공정성과 형평성 논란이 많았고 입찰자의 이의 제기를 통해 평가의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도 많았다. 이에 따라 발주자는 입찰 불발, 업체의 민원, 감사 등의 이유로 변별력 없는 평가 기준을 통해 최저가 입찰을 유도해왔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서울시 5·7호선 전동차 216량’ 입찰 과정에서는 최저가 입찰제로 인한 계약 지연 사태를 지적하는 국회의원과 서울시의원의 요구에 따라 평가 기준을 엄격하게 바꿨지만 ‘평가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일부 업체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여 결국 이전으로 돌아갔다.

또 지난 2021년 계약한 서울시의 위례 트램 구매는 입찰 시작 단계에서 ‘WTO 정부조달협정’ 미가입국인 중국 업체의 입찰 참여를 당연히 배제한다고 발표했으나 최저가로 낙찰받은 A 업체와의 기술 협의와 승인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정부의 국방수권법(NDAA) 대상 업체로 제재 대상인 중국 업체(CRRC)의 기술과 부품을 허용하고 승인했다. 그 결과 중국 설계와 제품이 도입돼 비판이 일었으며 현재진행형이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철도차량 발주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발주자가 원하는 기술적·관리행정적으로 필요한 모든 내용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대로 구매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이를 다하지 못하면 기술 능력이나 계약 이행 능력 부족을 걸러내지 못해 발주자가 원하는 정상적인 성능의 품질을 갖춘 철도차량을 제때 인도받을 수 없다”고 꼬집는다. 아무리 합리적인 제도라고 강변해도 가장 기본이 되는 ‘평가’가 제대로 정립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철도차량 산업은 올해 약 2조 원 규모의 발주를 시작으로 2028년까지 약 6조 원 이상의 대형 시장이 기대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거와 달리 대규모의 국내 발주 물량이 예상되고 있어 국내 철도차량 및 관련 업계에는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국내의 건전한 철도산업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중대 기로에 서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발주 기관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최우선의 가치로 둬야 한다. 잘못된 입찰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철도 관계자와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국회와 시의회의 정당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철도차량과 같이 대규모 인원을 장거리 이동시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산업에서는 엄격한 원칙에 따라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과 철도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철도 관계자는 “국민의 안전과 철도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철도차량 구매가 ‘원칙에 입각한 엄격한 평가 기준’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의 입찰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태현지 기자 nadi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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