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안보와 농업R&D 예산[기고/정천순]

  • 동아일보

정천순 (사)전국농학계대학학장협의회장
정천순 (사)전국농학계대학학장협의회장
최근 식량안보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세계 곡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 기후변화에 따른 천재지변 및 농산물 생육환경 변화, 세계적인 저성장·고물가, 미중 간의 패권 경쟁 등 글로벌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식량은 국가의 근간이 되는 국민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식량위기가 발생하면 국가의 대혼란, 불안정을 초래한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과 현재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식량은 국가의 존망, 안보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정부는 이러한 글로벌 식량위기 속에서도 농업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할 예정이다. 농업뿐만 아니라 기초과학 전 분야를 포함한 R&D 예산의 삭감이라지만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농업 분야에서의 예산 삭감은 심히 우려스러운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또 글로벌 식량위기 속에서 뚜렷한 해법도 제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긴 호흡이 필요한 농업 R&D 분야에서의 큰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농업 R&D는 생물을 직접 다루는 영역으로서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기는 어렵고, 중·장기 연구를 통해서만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또 기후변화에 따른 생육환경 변화, 질병 예방·치료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나, R&D 예산 삭감으로 앞으로의 연구는 물론이고, 기존의 연구성과도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편 농촌의 고령화, 인구 감소 등으로 농업·농촌의 존립이 위협받고, 농업 인력의 부족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 높아지는 상황에서 R&D 예산의 삭감은 농촌 소멸, 농업 인력 부재를 더욱 가속화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농업 소외론의 확산으로 농업인 사기 저하, 국제 농업경쟁력 저하, 청년 인재 이탈 등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소지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데도 국가재정 등의 이유로 R&D 예산 삭감이 불가피하다면, 무조건적이 아닌 정확한 성과와 중요성 평가를 통하여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혁신적인 연구, 국가 농업경쟁력을 위한 연구, 국제협력을 위한 연구,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연구에 우선적인 예산 배정이 필요하다. 또 예산 삭감을 전제로 하지 않고, 연구행정의 제도 개선을 통한 비용 절감과 연구 효율성 제고 방안도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농업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안정적인 식량을 공급받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이고, 국가는 이를 보장할 책무가 있다. 국가 경제가 어렵고, 재정이 열악하더라도 국민의 먹는 문제에서는 한 치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 농업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R&D 예산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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