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맛은 가라” MZ세대 스며드는 수제맥주

황태호 기자 입력 2021-05-15 03:00수정 2021-05-15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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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시장 ‘수입-국내 빅3’ 양분구도 무너진다
#1. 최근 한 편의점에서 ‘곰표 밀맥주’가 맥주 판매 1위에 올랐다. 카스나 테라 등 국내 대기업 맥주는 물론 수입 맥주까지 제치고 1위를 달려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곰표 밀맥주는 수제맥주 업체인 ‘세븐브로이’가 대한제분의 밀가루인 곰표 브랜드를 입혀 생산하는 맥주다. 지난달 말 생산량을 월 20만 개에서 300만 개로 대폭 늘렸는데도 2주 만에 ‘완판’됐다.

#2. 치킨업계 1위 교촌에프엔비는 수제맥주를 위주로 ‘치맥(치킨+맥주)’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이달 4일 주류업체 인덜지와 맥주 제조 사업을 위한 유무형 자산을 120억 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 전국 1280여 개 교촌치킨 가맹점을 수제맥주 유통 인프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최근 국내 맥주업계에선 대기업 3사(오비맥주, 하이트진로, 롯데칠성음료)가 아닌 수제맥주 관련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맥주는 ‘대동강맥주보다도 맛없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수제맥주가 개성 있는 맛을 앞세우며 수입 맥주가 ‘4캔에 1만 원’ 등의 판매로 장악했던 국내 맥주 시장을 빠르게 탈환하고 있다. 주류업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홈술’ 증가 및 주세법 변화 등과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 19년 전 ‘하우스맥주’로 시작

수제맥주는 미국의 ‘크래프트비어(craft beer)’를 번역한 용어다. 미국에서 양조협회(Brewers Association)가 인정하는 크래프트비어는 ‘주류담배과세무역청(TTB)’이 발급하는 양조면허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타 주류업계의 지분은 25% 미만(독립성)이어야 하고 생산량은 연간 600만 배럴 이하(소규모)이며 독창성을 가져야 하는 등 요건이 엄격한 편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하이트진로와 OB등 대기업 3사를 제외한 중소 규모 브랜드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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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수제맥주의 효시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일 월드컵이라는 세기의 이벤트를 앞두고 정부는 분위기 고취 차원에서 ‘소규모 맥주 제조자’ 면허를 도입했다. 당시 맥주 제조 일반면허의 양조시설 기준은 대기업이 아니면 맞추기 불가능했다. 익명을 요구한 주류업체 관계자는 “당시 대형 주류업체 경력자들이 대거 미국 크래프트비어 방식을 본떠 사업에 나섰다”고 했다. 수제맥주보다 ‘하우스맥주’로 불렸다.

하지만 하우스맥주는 이후 빠르게 쇠퇴했다. 양조장 인력의 실력이 균일한 품질을 보장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필바둥’으로 불리던 필스너, 바이젠, 둥켈 스타일에 천편일률적으로 집중됐고 소비자 반응도 시큰둥했다. 제조자의 영업장에서만 판매가 가능한 규제도 사업 확장의 걸림돌이 됐다.

그러다가 2012년 11월, 국내 맥주업계를 뒤흔든 보도가 나왔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대니얼 튜더가 쓴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맥주보다 맛없다’는 기사다. “라거 일변도의 한국 맥주시장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을 정확하게 꼬집었다”는 반응과 함께 수입 맥주의 점유율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편의점 등에서 ‘수입 맥주 4캔 1만 원’의 판매가 확산된 것도 이때쯤부터였다.

하지만 주류 관련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하면서 죽어가던 국산 수제맥주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014년 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맥주 제조자가 생산한 맥주를 다른 영업장에서 팔 수 있게 됐고, 2017년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 캔, 병맥주 형태로 유통할 수 있게 됐다. 비슷한 시기 제조자의 영업장 설치 의무도 없어졌다. 2017년 김외숙 당시 법제처장(현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비서관)은 대한변협신문에 기고한 ‘호프에서의 수제맥주 한 잔’이라는 글에서 “충남 공주시에 있는 한 소규모 주류 제조장에 가보니 제조장 옆에 필요하지도 않은 빈 영업장이 있었다”며 규제의 비합리성을 꼬집었다.

○ 소비 변화, 주세법 개정으로 빠르게 성장

수제맥주가 MZ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지난해 시장규모가 전년 대비 37% 커졌다. 제주맥주 제공
주류 규제 완화로 국내 수제맥주 매출도 증가했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국산 수제맥주 매출은 지난해 1096억 원으로 전년 대비 37% 증가했다. 이전에도 국산 수제맥주는 성장했지만, 매출을 유흥(식당 등) 채널과 소매(편의점, 마트 등) 채널로 나눠 보면 성장 요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유흥 채널 매출은 525억 원에서 362억 원으로 31% 줄었지만, 소매 채널 매출은 275억 원에서 734억 원으로 167% 증가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코로나19로 인한 ‘홈술’ 문화 확산, MZ세대의 등장 등 소비시장의 변화다. 코로나19로 집에서 술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대규모 주류회사의 ‘영업력’이 덜 미치는 소매 채널 중심으로 맥주시장이 재편된 것이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은 대기업의 라거 외에도 곰표맥주와 같은 위트 있는 콜라보 맥주, ‘광화문에일’ ‘강서맥주’ 등 지역명을 딴 새로운 맥주에 열띤 호응을 보였다. 소매 채널의 콜라보 맥주는 반일 불매운동으로 사실상 퇴출되다시피 한 일본 맥주의 빈 자리를 빠르게 꿰찼다. GS25 관계자는 “편의점에서 수제맥주 점유율은 10%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변화는 지난해부터 맥주에 매기는 세금이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바뀐 것이다. 종가세는 맥주의 출고 가격에 일정 비율로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다. 소규모 제조로 ‘규모의 경제’가 부족해 생산 원가가 높은 데다 개성 있는 원료, 제조 방식을 추구하는 수제맥주로선 세금이 덩달아 가중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반면 종량세는 맥주 종류, 도수와 무관하게 L당 830.3원의 일정한 세금을 부과한다.

주세법 개정에 따라 수입신고 가격에만 세금이 부과되던 저가 수입맥주는 주세부담액이 늘어난 반면, 수제맥주의 부담액은 줄었다. 이전 종가세 체제에서는 맥주의 제조원가, 판매관리비, 마진 등이 포함된 맥주 가격에 주세(72%)와 교육세(30%) 등을 부과해 세금이 판매가의 48.3%에 달할 정도였다. 주류업계는 500mL 한 캔에 부과되는 주세가 최대 500원까지로 줄어든 것으로 본다. 박정진 카브루 대표는 “종량세 도입으로 수제맥주의 소매시장 진출과 대중화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주세법 개정과 함께 허용한 주류 OEM은 대기업까지 이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롯데칠성음료는 충북 충주시 제1공장에 수제맥주 생산을 위한 설비투자를 진행하고 제주맥주, 세븐브로이, 더쎄를라잇브루잉 등 수제맥주 업체들의 OEM 생산을 진행하고 있다. 맥주업계 1위 오비맥주도 OEM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런 수제맥주 활황세를 타고 자본시장에서도 수제맥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수제맥주기업인 제주맥주는 처음으로 코스닥 상장에 나선다. 14일 공모주 청약을 받은 결과 청약 경쟁률이 무려 1748.25 대 1에 달했다. 청약 증거금만 5조8000억 원에 이른다.

한국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세는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이달 17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 코엑스에서 열리는 ‘대한민국맥주산업 박람회’에는 미국 양조협회 소속 33개 크래프트비어 브랜드가 참여한다. 이번 행사에서는 최초로 국산 맥아로 만든 수제맥주 7종도 선보일 계획이다. 국내 시장 역시 해외처럼 수제맥주 비중이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에선 ‘잉링’ ‘보스턴비어컴퍼니’ ‘시에라네바다브루잉’ 등 주요 크래프트비어 브랜드가 전체 맥주시장의 톱10에 든다. 수제맥주 업계 관계자는 “수제맥주가 성장하면서 고착화됐던 맥주산업의 생태계까지 서서히 바꾸고 있다”며 “국내 시장점유율이 점점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수제맥주#맥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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