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역시 재규어지”라는, 다소 근거 없는 로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다(기자도 그중 한명이다). 재규어가 가진 다양한 이미지들이 그런 로망을 만들어 냈겠지만, 기자는 그중 ‘리퍼(Leaper)’의 존재가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에 나온 재규어 차 보닛 앞부분에는 재규어가 뛰어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인 ‘리퍼’가 붙어 있었다. 정글을 그림자처럼 배회하다가 먹잇감을 향해 도약하는(leap) 맹수의 모습은 재규어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이 리퍼를 앞세우고 도로를 누비는 재규어를 타면 세상의 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영화 ‘더 킹’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부잣집 딸과 결혼한 박태수(조인성 분)는 계급제 사회였던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신분 상승을 이루고 빨간 재규어도 얻는다. “신입 때부터 재규어 소버린을 타고 출근할 순 없잖아”라며 겉으로는 부를 숨기면서도 평상시에는 재규어를 타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즐긴다. 그때 카메라는 리퍼를 클로즈업한 뒤 조인성의 자신만만한 얼굴과 재규어를 한 화면에 담는다. 잠깐 등장하지만 리퍼는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버린’은 재규어의 최상위 모델인 ‘XJ’ 중 최상위 트림을 일컫는 용어다. XJ 중에서도 실내·외 디자인을 더 고급스럽게 하고 좋은 소재를 쓴 것이 특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재규어는 시대적 배경을 봤을 때 1994년 나온 3세대 XJ로 보인다. 지금은 ‘클래식’이 된 차여서 현재의 XJ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지금 판매되는 XJ는 8세대 모델로, 2009년에 출시돼 지난해 2월 부분변경을 거쳤다. XJ는 보닛부터 후면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실루엣인 ‘윌리엄스 라인’이 특징이다. 윌리엄스 라인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중 살아 있는 생명체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동차다”라고 말한 재규어 창립자 윌리엄 라이언스 경의 이름을 딴 것이다.
8세대 XJ부터는 리퍼가 사라지고 그 대신 재규어가 포효하는 모습을 담은 ‘그롤러’ 엠블럼이 등장했다. 보행자가 차와 부딪혔을 때 보닛 위로 튀어나온 조형물이 보행자를 더 크게 다치게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규제가 강화돼 리퍼가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뛰어오르는 맹수의 조형물을 보닛에서는 볼 수 없게 됐지만 그 형상은 재규어 로고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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