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9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최승우 씨(현 넥슨저팬 대표)는 막막했다. 입사한 지 불과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넥슨의 83번째 직원인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일본법인을 세워라.’ ㈜대우에서 글로벌 경영현장을 누비던 그였지만 온라인게임으로 일본 시장을 정복하라는 미션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였다. 당시 일본은 비디오게임의 제왕 닌텐도가 지배하는 게임왕국이었다. 그래서 ‘게임=비디오게임’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인터넷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생 벤처 넥슨이 많은 돈을 쏟아 부을 상황도 아니었다. 1996년 내놓은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때였다. 한류(韓流)는 고사하고 한국문화라 하면 한 수 아래로 보는 시각도 넘어야 했다. 》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자면 수십 개였다. 하지만 넥슨 창업자 김정주 NXC 회장은 해야 하는 이유 하나만 봤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은 필연적으로 글로벌하기 때문에 인터넷 기반의 넥슨도 글로벌 회사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태어나자마자 세계로 나가는 회사, ‘본 글로벌’을 그렸다. 그래서 1997년 ‘무모하게도’ 미국 실리콘밸리에 국내 온라인게임업계 최초로 법인을 세웠다. 일본에도 가장 먼저 진출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옳았다. 넥슨은 현재 약 1조 원에 이르는 매출의 70%를 해외에서 벌어들인다. 세계 72개국에 서비스한다. 넥슨의 지배구조도 지주회사인 NXC가 넥슨저팬을 지배하고, 넥슨저팬이 한국지사(넥슨)와 넥슨아메리카 등을 소유하는 형태다.
○ ‘재수’에서 얻은 교훈
1999년 11월 최 대표는 가까스로 일본에서 인터넷을 좀 아는 웹 호스팅업체 사장을 찾아가 함께 법인을 만들었다. 넥슨저팬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냉정했다.
“처음에는 ‘바람의 나라’ 평균 동시접속자가 1.1명이었어요. 저와 직원 한 명이 번갈아 게임하는 게 다였으니까. 이 수치가 0점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둘이서 눈만 뜨면 접속했지요.” 올 초 도쿄 넥슨저팬 사무실에서 만난 최 대표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동시접속자가 30명으로 늘어났다. 최 대표와 직원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번개파티’를 열었다.
중국 진출 ‘카트라이더’ 게임의 한 장면.하지만 이 정도로는 회사가 운영될 리 없었다. 적자를 메워주는 웹 호스팅업체에 눈치가 보였다. 온라인게임이 뭔지 모르는 일본인이 아직 많았다. 미안한 마음에 결국 합작법인을 접고 2002년 단독법인을 세웠다.
최 대표는 “사실상 ‘재수’를 한 셈인데 한 차례 실패를 겪은 재수생이 마음잡으면 더 무섭다”며 “원점으로 돌아가 일본인들에게 온라인게임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과 최 대표는 일본 단독법인을 차릴 당시 서울에서 가구를 들고 와 일일이 조립했다. 값비싼 일본 가구는 그들에겐 사치였다.
그렇게 아끼고 아낀 돈은 광고마케팅에 썼다. 온라인게임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일본 롯데껌 포장지에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애초에 일본 롯데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가 제휴하자고 하니 어이없어 했다. 그러나 2007년 나온 ‘메이플 스토리’ 껌은 시판 하루 만에 25만 개가 모두 팔렸다. 껌으로 시작된 롯데와의 인연은 야구로 이어졌다. 넥슨저팬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바롯데 마린스를 정식 후원한다. 2009년 넥슨의 일본 매출은 약 120억 엔(약 1560억 원)에 이른다. ▼ 美-日-中시장 안착… 日증시 상장도 준비 ▼
○ 닌텐도·디즈니 넘는다
해외사업본부장을 겸하는 최 대표는 “사실은 미국법인도 ‘재수생’”이라고 귀띔했다.
1997년에 진출했다 2004년 법인을 팔아버렸다. 고구려가 배경인 데다 동양인이 주인공인 게임은 미국인에겐 너무나 생소했다.
게임은 문화콘텐츠라 현지와 호흡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이재교 넥슨 홍보이사는 “2005년 다시 진출할 때에는
최초로 부분 유료화 모델을 만들고 인터넷에서 신용카드를 쓰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편의점, 대형마트에서 선불카드를 팔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버려진 게임도 미국과 유럽인 입맛에 맞춰 다시 서비스했다.
넥슨은 공식적으로 말을 아끼지만 일본
증시에 상장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임업계는 넥슨이 상장하기만 하면 시가총액(주식 수×주가)이 13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 세계 최대 게임업체인 액티비전 블리자드에 뒤지지 않는 액수다.
하지만 김 회장과 최 대표는 블리자드에
비견되는 게 성에 차지 않는다. 이들의 머릿속엔 ‘5년 후 닌텐도를 잡고, 디즈니를 넘는다’는 그림이 있다. 넥슨이 현재 일본에서
잘나간다 해도 현지 온라인게임 비중은 10%도 안 된다. 여전히 비디오게임이 40%가량을 차지한다.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최 대표는 “그 역시 인터넷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비디오게임도 결국은 인터넷에 포섭될 거라는 게 창업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지켜온 믿음이다. 실제로 TV가 인터넷과 연결되는 스마트TV가 팔리는 걸 보면 믿음대로 가고 있다는 게 넥슨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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