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는 중견기업들]<下>‘3사 3색’ 중견기업 도약의 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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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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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허리’ 중견기업 현장점검

《‘중견기업’의 설 자리가 없다.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가 안 생기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허리가 될 중견기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불합리한 제도와 기업가정신의 실종으로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덩치가 커져도 투자와 고용을 멀리하고, 내수시장에 안주하려는 기업이 많은 가운데 중소기업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쳐나와 세계로 웅비하려는 ‘독한’ 중견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연구개발(R&D) 투자, 인재육성, 수출에 힘써 중견기업으로 새로 태어나려는 ‘3사(社) 3색(色)’ 현장을 찾아갔다.》
■ 피혁 업체 ‘해성아이다’
금융위기로 남들 움츠릴때 150억 공격투자
버버리 나이키 등이 고객… 매출 90%가 수출


‘버버리, 발리, 코치, DKNY, 지방시, 캘빈클라인, 나이키….’ 귀에 익숙한 글로벌 패션브랜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국내 가죽전문기업 ‘해성아이다’로부터 원단을 납품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해성아이다는 글로벌 피혁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유망기업이다. 1999년 창업해 11년 만에 매출을 10배 이상으로 늘린 이 회사는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1200억 원대 매출을 올렸다. 이 중 90%가 수출로 번 돈. ‘1억 달러 돌파 수출탑’은 이미 2007년에 받았다. 이탈리아 등 유럽 업체에 뒤지지 않는 고품질의 가죽 만들기에 전념한 결과다. 본사 직원 수(200명)로 따지면 아직 중소기업이지만 매출은 이미 중견기업 반열에 올라섰다.

2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반월공단 내 해성아이다 본사에서 만난 이 회사 양영대 회장은 “우리 회사의 성공에는 연구개발(R&D)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양 회장은 회사 설립 이후 꾸준히 매년 평균 50억 원을 신규설비 도입과 R&D에 투자하고, 이탈리아 가죽기업들의 고급기술을 벤치마킹했다. 지난해 글로벌 경기침체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새 공장 설립에 150억 원을 투입했다.

“우리 회사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규모로는 안 됩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 기업과 경쟁하려면 (중소기업 지원 혜택을 잃는 것이) 고심이 되긴 하지만 중견기업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 회장은 중견기업으로 회사를 육성하려면 쓸 만한 인재가 필요한데, “정말 ‘사람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R&D를 주도할 기술 인재는 고사하고 해외 바이어에게 보낼 영어 e메일 하나 쓸 직원조차 고용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 회사는 영문학을 전공한 한족(漢族) 출신 직원을 가까스로 구해 영어와 중국어 문제를 해결하고 했다.

해성아이다에는 본사 직원 200명 외에도 소사장들이 고용한 임시 직원 120여 명이 더 있다. 중기 현장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임시직을 채용해 쓰고 있다고 했다. 양 사장은 “반월공단엔 외국인 직원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할 공장이 태반”이라며 “이런 현실이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만 쳐다보고 있는 국내 우수 청년들이 한 명씩만 중소기업에 와 줘도 우리나라 중견기업은 엄청나게 클 겁니다. 한쪽에선 사람이 없어 난리인데 다른 한쪽에선 실업자가 넘쳐나니…. 이 잘못 꼬인 실타래를 정부가 꼭 좀 풀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안산=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 부탄가스 만드는 ‘승일’
前삼성 인사담당 영입 ‘대기업급 인재관리’
40% 달하던 이직률 5년새 5%로 떨어져


“뽑아 놓으면 나가고, 뽑아 놓으면 나가고…. 제일 고민이던 직원 이직 문제가 해결되니까 회사의 미래가 보입니다.” (승일 경영전략본부 조성경 부사장)

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승일 본사에서 만난 조 부사장은 “5년 전부터 힘써 온 직원 교육과 복지 시책이 요즘 하나둘 열매를 맺는 것 같다”며 환히 웃었다.

승일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부탄가스와 에어졸(스프레이) 제품의 약 70%를 생산한다. 일반인들에게는 ‘썬연료’라는 부탄가스 제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연간 매출은 3000억 원에 이르고, 세계 60여 개국에 700억 원어치를 수출한다. 직원 수는 700명에 이르러 중견기업의 역량을 갖췄지만 외형적으로는 승일 태양산업 세안산업 등 3개 회사로 분리해 그동안 중소기업이라는 ‘법적 둥지’ 안에서 성장해왔다.

그러나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면서 몇 년 전부터 승일은 더는 중소기업에만 머물 수 없게 됐다. 시장성 높은 신흥국과 선진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중견기업으로 날아올라야 했다.

승일의 현창수 대표는 중견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인재와 기술력 확보가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2006년 삼성의 인사담당 출신인 조 부사장을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 부사장은 “입사 지원자들이 있기는 한데 ‘다닐 마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며 “체계적인 교육과 복지제도로 직원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승일은 사내 선배들이 강사로 나서는 실무교육을 비롯해 전문 교육기관과 손잡고 경영, 외국어, 인재관리, 리더십 등 500여 개 사이버 교육 강좌 운영에 나섰다. ‘교육비 지원엔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내걸었다. 중견기업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공장 안에 ‘사내 어린이집’도 만들었다.

전문 상조서비스업체와 계약해 가족상을 당한 직원들을 지원했고 서울 본사 및 인천, 천안공장에 전문 안마사를 상주시켜 마사지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이 덕분에 30∼40%에 이르던 직원 이직률이 5년 새 5%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연구개발(R&D) 부문에서는 아직도 인재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R&D에 투자할 돈은 있는데 사람이 없어서 기술개발을 못한다고 했다. 조 부사장은 “정부나 대학의 연구원들이 1, 2명씩이라도 중소 중견기업과 손잡고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중견기업들이 자체 R&D 역량을 갖고 창의적 제안을 할 수 있어야 대기업도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 절삭공구 업체 ‘와이지원’
설립때부터 수출 염두… ‘엔드밀’ 세계 1위
“발주처 술 대접할 시간에 다른 시장 개척”


“몇 년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구매담당 직원이 하도 거들먹거리기에 꾸짖어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지난달 인천 부평구 청천동의 절삭공구업체 와이지원 본사에서 만난 송호근 대표(58)는 “단 한 번도 발주처에 술 사주고 뇌물을 건네면서 영업한 적이 없다”며 단호한 표정으로 이처럼 말했다. 대기업 협력업체에 속한 일부 중견, 중소기업들이 전직 대기업 임직원을 영입해 로비에 나서는 것과 비교하면 와이지원의 영업방식은 적어도 한국에선 별종인 셈이다. 송 대표는 “주변의 절삭공구 업체 대표들이 우리 회사를 보면서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며 시원해 한다”고 전했다.

1748억 원(2008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 이렇게 국내 대기업에 꿋꿋할 수 있는 것은 1981년 창사 당시부터 외국시장 개척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송 대표는 창사 4년 만에 미국 시카고 지사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996년 영국, 1997년 독일, 2001년 중국, 2002년 프랑스 인도, 2007년 브라질 일본 등에 현지 법인을 잇달아 설립했다. 현재 15개국에 생산 혹은 판매법인을 두고 세계 75개국에 수출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에 따라 이 회사는 전체 매출의 80%를 외국에서 달성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 절삭 공구업계 1위, 엔드밀 생산량 세계 1위에 올라 있다. 비록 규모는 대기업에 미치지 못하지만 특정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제패한 ‘글로벌 강소기업’인 셈이다.

중견기업인으로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를 묻자 송 대표는 지난해 초에 있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낸 작년 초 와이지원 관계자가 한 국내 신용보증 기관을 찾았다. 기업 신용보증 담당자는 “분석 결과 기업여건이 훌륭하다”며 와이지원이 써낸 것보다 2배나 많은 액수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일 퇴근 직전 송 대표는 돌연 신용보증이 취소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전에 만났던 담당자가 “중소기업을 최우선으로 지원하라는 정부 지침이 있었다”며 한 푼도 보증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한 것.

류광하 경영본부장은 “당시 사장님께 ‘왜 중소기업을 졸업해서 이 고생을 사서 하시느냐’고 푸념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와이지원은 2002년 중소기업 졸업으로 3년 유예기간을 거쳐 2005년부터 각종 지원이 끊겼다.

중소기업 범주에 남아 있기 위해 분사(分社)까지 시도하는 다른 중견기업들과 달리 지금껏 한 개 회사로 기업규모를 키워온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송 대표의 대답은 명쾌했다. “꼼수 부리는 게 싫었습니다. 무엇보다 시장개척 외의 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에겐 하루하루 성장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인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동기획: 기업은행 IBK경제연구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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