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투자 문화 후퇴

  • 입력 2009년 4월 24일 21시 49분


중견기업에 다니는 권모 씨(36)는 요즘 점심시간이면 사무실에 홀로 남아 빵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최근 코스닥 시장에서 사들인 발광다이오드(LED) 테마주인 L사의 주가를 확인하면서 주식투자 책도 읽기 위해서다. 회사 인근의 증권사에서 신규 계좌를 만든 뒤 넣어둔 돈은 총 3000여만 원. 2007년 10월경부터 브릭스 펀드에 5000만 원을 적립식으로 투자하다 최근 환매해 남은 돈이다. 그는 "펀드 판매를 적극 권유하던 은행이 원금을 까먹어도 환매를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자하라는 충고는 하지 않았다"며 "꼬박꼬박 수수료를 주느니 내가 직접 투자하는 게 낫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반토막' 펀드에 분통이 터진 투자자들이 펀드를 깨서 직접 투자에 나서고 있다. 뭉치 돈을 꺼내든 '큰 손'들도 펀드 대신 증권사 객장의 직원을 먼저 찾고 있다. 자산운용사와 판매사를 불신하는 투자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금융권이 보여준 미숙한 투자자 보호와 리스크관리 행태에 원죄(原罪)가 있다. 하지만 힘들게 쌓아온 간접투자문화가 뒷걸음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증시 고점에 투자한 개미들이 결국에는 빈털터리가 되던 과거의 증시 패턴이 반복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주식 시장 점령한 개미들

재건축 단지인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1단지 43㎡형을 사려던 박모 씨는 요즘 아파트 매입 대신 주식 투자에 나섰다. 올 들어 집값이 2억 원 가까이 오르자 매수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한 것. 박 씨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 6억여 원을 강남의 한 증권사 객장에 맡겼다"며 "객장 직원을 통해 거래를 해도 펀드 수수료보다는 훨씬 싸다"고 말했다. 큰 손들도 직접투자에 나서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이영주 부장(서울 도곡중앙 지점)은 "토지 보상금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적게는 수천 만 원에서 많게는 3~4억까지 돈을 맡기며 단기 직접투자를 원한다"고 전했다.

개인의 직접투자가 증가하면서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들의 매매비중은 거래 대금 기준으로 13일에 전체 거래량의 70%를 넘어섰다. 코스닥 시장에서도 매매의 93% 이상은 개인의 몫이다. 올해 들어 3월말까지 새로 개설된 주식 계좌도 23만7415개에 이른다. 반면 기관투자가들은 코스피 시장에서 6일부터 15일 연속 순매도에 나서고 있다. 대신증권 성진경 시장전략팀장은 "국내 주식형펀드의 설정액이 환매 등으로 지난해 말보다 9968억 원이나 줄면서 기관들이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펀드에 분노한 '앵그리 머니(Angry money)'가 증시로

증시 전문가들은 시장을 주도하는 개미들의 돈이 이른바 '앵그리 머니'로 본다. 코스피가 1300선을 유지하는 시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펀드 가입자들이 아예 펀드에서 이탈해 증시의 대기자금인 예탁금으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증권 이승우 연구원은 "비슷한 시기에 환매는 늘고 고객 예탁금이 늘어난 것은 펀드 투자로 큰 손해를 본 개인들이 자산운용사 등에 불만을 품고 직접 투자에 나섰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경제평론가인 박경철 씨는 "정기예금을 하지말고 펀드를 하라고 부추긴 은행이나 중국 펀드에 몰빵식 투자를 하면서 투자자들의 손해를 키운 자산운용사가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펀드 수수료의 불합리한 구조가 드러나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직접 투자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펀드 수수료는 맡긴 돈의 연간 2.5~3%에 달하지만 개인이 홈트레이딩시스템(HTS)으로 직접 매매를 하면 한 번 거래에 거래금액의 0.015% 수준에 불과하다.

개인 투자자들의 잘못도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특정펀드에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해 결국 다른 자산운용사들이 모방상품을 내다보니 하락기에 투자자들의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투자문화의 후퇴 우려

직접투자로 나마 돈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면 주가의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개미들의 정보력이나 분석력이 과거보다 크게 향상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정보기술(IT)버블의 붕괴 때처럼 결국 막대한 개인 투자자의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압도적인 의견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가 상승국면에 접어든 3월 초부터 20일까지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 순매수 상위 20개 종목의 평균주가 상승률은 18.43%로 조사됐다. 같은 기간의 설정액 증가 상위 20개 주식형 펀드의 평균수익률 30.02%를 보여 개미들을 압도했다.

최근 정착되던 간접투자 문화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국내 자본시장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직접투자가 증시를 좌지우지하면 주식의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괴리가 커져 증시 변동성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연구위원은 "증시가 불안해지면 안정적인 자본이 들어오지 않아 국내 증시가 외국인의 투기장으로 변할 수 있다"며 "결국 대규모 자금이 장기간 기업에 공급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자본시장도 후퇴하게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세진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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