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입으로 간 2兆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3분


전자제품을 만드는 A사는 한 해 매출액이 1000억 원을 넘고 종업원이 550명에 이른다. 자회사도 5곳이나 소유하고 있지만 자본금이 60억 원으로 중소기업 기준(자본금 80억 원 이하)보다 낮은 탓에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며 각종 혜택을 받고 있다.

2006년 말 기준으로 약 2조 원의 중소기업 정책자금이 대기업 자회사 등 비교적 재무상태가 탄탄한 기업에 지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빌리기 힘든 군소 중소기업에 돌아가야 할 정책자금이 줄줄이 새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청이 중소기업 기준을 바꿔 2000여 개의 ‘무늬만 중소기업’인 업체를 중소기업 범주에서 제외하겠다고 28일 밝힌 것도 이 같은 실태를 개선하고 중소기업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 정책자금 2조 원 우량 기업에 돌아가

29일 중소기업청이 이재선 자유선진당 의원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말 기준으로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은 대기업 자회사 등 재무상태가 탄탄한 기업 814곳에 1조7460억 원을 보증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2006년 말 기준으로 197곳에 1020억 원을 빌려줬다.

이 보고서는 중소기업청의 용역을 받아 기업은행이 작성한 것이다.

기업은행은 증권선물거래소에 상장된 기업과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속한 기업 등 2810곳을 ‘자생력을 갖춘 기업’으로 보고 해당 기업 및 그 자회사(2만48개)에 대한 지원 현황을 조사했다.

자생력을 갖춘 기업 및 자회사에 지원된 1조8480억 원 중 코스피시장 상장 기업에 2220억 원이 지원됐고 코스닥시장 상장 기업에 8890억 원이 지원됐다. 2006년 말 기준으로 신보와 기보의 전체 보증잔액은 39조6750억 원이며 중진공의 대출잔액은 2조590억 원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심상규 기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전체 자금에서 자생력을 갖춘 기업에 지원된 금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4.4%로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효율적 자원 배분을 고려하면 중소기업 범위의 합리적인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편법으로 중소기업 지위 유지

현행 중소기업기본법은 대기업 계열사에 중소기업 지원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산 5000억 원 이상인 대기업이 주식의 30% 이상을 갖고 있는 기업을 중소기업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대기업 등이 30% 미만의 지분으로 소유하는 자회사의 수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생력을 갖춘 기업의 국내 자회사 1만524개(해외 자회사 9524개는 제외) 중 모기업이 지분 30%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2568곳(24.4%)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중소기업으로 분류돼 정책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의미다.

또 보고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편입되면 3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이후 중소기업 혜택을 박탈하는 현행 제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에 따르면 2004년 대기업으로 진입한 157개 기업 중 2007년까지 대기업 지위를 유지하는 곳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74개에 불과했다.

일부 기업이 계속 지원을 받기 위해 회사를 분할하는 등 편법으로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 자생력 갖춘 2000곳 중소기업에서 제외

이 같은 연구 결과가 나오자 중소기업청은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자생력을 갖췄지만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 2000여 곳을 중소기업에서 제외하겠다고 보고했다.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기업이 간접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나 현재 중소기업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근로자(1000명 이상), 자산총액(5000억 원 이상), 자본금(1000억 원 이상)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중소기업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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