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어 같은 금융 용어 “좀 쉽게 쓰면 안되겠니”

  • 입력 2006년 2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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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경우선(24·서울 양천구 목동) 씨는 얼마 전 자동차보험에 가입하려고 약관을 읽다가 ‘기한의 이익 상실’이라는 표현에서 막혀 버렸다.

민법에 나오는 말로 ‘(빚을 갚아야 하는) 기한을 미뤄 놨는데 이런 혜택이 없어져서 즉시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경 씨는 “경제학을 전공했고 법학 수업도 들었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정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영달(令達), 사위(詐僞), 각입(刻入) 등 금융계에는 ‘외계어(外界語)’ 수준의 용어가 수두룩하다. 보험과 관련된 용어는 나중에 소비자와 보험사 사이에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 상피내암, 적제, 천자…

한 생명보험사의 상품 광고에는 ‘상피내암으로 진단 확정됐을 때’라는 표현이 있다. 하지만 ‘상피내암’이 뭔지 설명이 없다.

다른 보험사가 내놓은 약관을 보면 ‘암세포가 상피와 기저막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상피 내부, 즉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신생물. 형성 이상과 침습성 암 사이의 형태학적 변화의 연속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긴 설명이 붙어 있지만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생명보험 상품의 약관에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질병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만 일반인은 질병 이름은 물론 설명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보험 약관마다 공통으로 실려 있는 ‘수술’에 대한 규정은 ‘생체에 절단 적제 등의 조작을 가하는 것을 말하며 흡인 천자 등의 조치 및 신경 차단은 제외한다’고 돼 있다.

‘적제’는 수술에 해당되고, ‘흡인’이나 ‘천자’는 수술이 아니라는 뜻이다. 보험 약관만 봐서는 자신이 병원에서 받은 치료가 ‘수술’인지 알 수 없다.

○ 어려운 용어를 바꾸자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보험업계와 함께 234개 보험용어를 쉽게 고치는 작업을 했다. 부보(보험 가입) 시방서(설명서) 기왕증(이미 걸린 병) 배서(뒷면에 기재) 등 2004년까지 수십 년이 넘도록 보험업계가 쓰던 용어다.

하지만 일부 보험사 약관은 ‘추상(추한 모습)’ ‘경추와 흉추(목뼈와 등뼈)’ 등 지적된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보험뿐 아니다. 일반 기업이 금융회사와 거래할 때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표현이 많다.

신용보증기금은 최근 이런 말을 모아 쉽게 고친 ‘바른 용어 사전’을 펴냈다.

신보 김형석 기획팀장은 “‘징구 서류’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대부분 고객이 못 알아들을 뿐 아니라 단어 어감이 나빠 언짢아했다”고 말했다. 징구 서류는 이번에 ‘제출 서류’로 바뀌었다.

○ 용어 바꾸기 만만치 않다

삼성생명은 지난해부터 종신보험 상품의 약관을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나올 한 종신보험의 약관은 350쪽 분량이다. 이렇게 두꺼워진 이유는 용어를 바꾸는 대신 일일이 설명을 붙였기 때문.

보험업계 관계자는 “개별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새로운 용어로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질병 이름은 통계청에서 정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 규정돼 있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황선옥 이사는 “보험 약관에 워낙 전문 용어가 많아 가입자가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제대로 모를 때가 많다”며 “특히 TV홈쇼핑은 설명 부족으로 소비자의 이해도가 더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최지원(서울대 사회복지학과 4년) 이현민(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2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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