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보수-사회적 홀대… 노력해도 성공에 한계"

  • 입력 2005년 11월 1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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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대기업 L그룹 계열사의 중국 현지 연구소장을 지낸 이모(46) 씨.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공학 박사인 그는 작년 말 연구소를 그만두고 상하이(上海)에 머물고 있다.

이 씨가 본업에서 손을 뗀 표면적인 이유는 인사 문제 때문. 20년 가까이 신약 개발만 해 오다 갑자기 마케팅을 권유받고는 사표를 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문계 중심의 조직 문화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씨는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경영자들은 이공계 인력들이 내놓은 개발 성과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아이들도 이공계를 희망하지만 적어도 첫 직장을 한국에서 찾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 “이공계 우대, 아직은 남의 일”

이공계 고급 두뇌들이 외국행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처우가 좋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공계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고, 직장에서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승진할 기회가 적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이공계 최고경영자(CEO)를 우대하고 있지만 아직은 특수한 사례일 뿐이다.

당장 실용화될 수 있는 분야를 제외하곤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기초과학 우수 인재를 흡수할 여유가 없다는 점도 이공계 인력의 해외 유출을 가속하는 요인이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김모(41) 씨는 남몰래 미국 약학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학(화학)박사인 김 씨가 뒤늦게 약학을 전공하려는 이유는 다국적 제약회사나 병원에서 일하기 위해서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조그만 약국을 차려 미국에 눌러앉을 작정이다.

김 씨는 “박사급 연구원이라고 해도 앞날을 자신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본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고민이 잘 드러난다.

응답자의 45.7%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공계 출신이 직장에서 성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답했다. 직급별로는 중간 간부인 과장과 차장급에서 51.7%가 이같이 답해 비중이 높았다.

이공계 인력의 해외 유출을 완화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는 ‘낮은 보수’(36%)와 ‘이공계 인력에 대한 낮은 사회적 존중’(27.7%)을 많이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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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에서 떠도는 고급 인력

미국의 한 천문대에서 10여 명의 외국 학자를 이끌고 ‘외계행성 탐색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신모(39) 씨.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2000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년 전 진로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현지 천문대로부터 연구 책임자가 돼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신 씨는 “프로젝트를 맡으면 10년은 한국에 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하지만 한국에는 거대 망원경 같은 천문 관측 장비가 없어 ‘백수’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에 있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생명공학을 연구 중인 윤모(35) 교수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대기업 연구소에 있다가 외환위기 때 40대 중반의 선배 연구원들이 명예퇴직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과정 중에 세계적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는 등 일찍부터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에서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윤 교수는 “한국의 기초과학 분야 연구환경이 미국보다 떨어지는 데다 우수한 학생들은 대부분 유학을 떠나 후학을 키우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기술인력 가운데 국내에 남는 비율을 나타내는 ‘두뇌 유출지수’는 1997년 6.49에서 2002년엔 4.70으로 떨어졌다. 고급 두뇌 10명 중 5명 이상이 해외로 떠난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8.96)은 물론 대만(7.08), 중국(5.2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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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뇌 유출인가, 두뇌 파견인가

우수한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견해도 많다.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 김광회(金侊會·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 회장은 “미국의 대학이나 기업에 한국인들이 진출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고급 기술을 배운다면 궁극적으로 한국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두뇌 유출보다는 두뇌 파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반면 한국개발연구원(KDI) 우천식(禹天植) 선임연구위원은 “외국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뒤 귀국하려 해도 자리가 없어 ‘중간인’이 되는 우수한 인재가 많다”며 “국가 차원에서 고급 인력을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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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기자 koh@donga.com

김훈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wolfkim@donga.com

▼“제발 떠나지 마세요”… 대기업 ‘당근 작전’▼

“국내외에서 끌어 온 ‘핵심 인력’에 주거, 의료, 금융거래, 통신 문제 등 개인 편의까지 완벽하게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산업정책연구원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이 개최한 ‘핵심 인재, 이탈을 막아라’ 세미나에서 삼성전자가 밝힌 인재 이탈 방지 방안이다.

삼성전자는 핵심인력 지원조직인 ‘글로벌 헬프 데스크’를 6명에서 23명으로 늘려 사생활까지 철저히 지원한다. 사장급 경영진은 해외에서 영입한 우수 인재들을 분기별로 만나 회사 생활의 어려움을 듣고 해결책을 마련해 준다.

핵심 인재의 이탈 징후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조기 경보체제’도 운용한다. 이직 징후에 따라 안정을 뜻하는 ‘녹색’, 불안정한 상황을 보여 주는 ‘노란색’, 이직 징후가 강해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하는 ‘빨간색’ 등 3단계로 구분돼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인재 확보도 중요하지만 인재가 회사에서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사후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해외 고급인력에 대한 영입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LG그룹도 우수한 실적을 낸 연구개발(R&D) 및 마케팅 인력에게 파격적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보상 시스템을 강화했다.

LG전자는 5월 홍콩의 3세대 휴대전화 사업자인 허치슨과 10억 달러 규모의 광대역 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방식 휴대전화 공급 계약을 하는 데 기여한 기술진과 마케팅 부서 직원 2200여 명에게 수백만 원에서 최고 1억 원까지 ‘타깃 인센티브’를 지급하기도 했다.

또 우수 인재에 대한 보상을 늘리기 위해 지주회사인 ㈜LG를 비롯해 LG전자 LG필립스LCD LG화학 등이 올해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했다.

포스코도 내년부터 ‘프로젝트 기반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핵심 인재 관리를 강화할 계획이다. 공기업 시절의 특성 때문에 높은 성과를 내도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내부 평가에 따른 조치다.

현대자동차는 ‘신기술 특허 실적 장려금’ 제도를 도입했다. 신기술 개발에 기여한 인재들에게 1인당 최고 5000만 원까지 포상금을 지급한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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