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간 뇌물, 규모 커지고 갈수록 은밀해져”

  • 입력 2004년 8월 12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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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일본기업인들의 모임인 재팬클럽이 10일 한국 정부에 “기업간에 납품을 할 때 ‘뇌물’을 요구하는 관행이 많다”고 호소하면서 기업 내부의 부패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재팬클럽의 지적은 대기업들이 그동안 “2000년 이후 기업 내부 비리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고 주장해 온 것과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국내 주요 대기업은 몇 년 전부터 ‘윤리경영’을 내걸고 기업 내부의 부패를 줄이기 위해 힘써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당수 중소기업인은 “명절 선물 돌리기, 룸살롱 접대 등 밖으로 드러나기 쉬운 부패는 많이 사라졌지만 핵심적 비리는 더욱 은밀해지고 규모도 커졌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신규 거래처를 선정하거나 납품 단가를 조정하는 등 중소기업의 생존이 걸린 사안과 관련해 ‘갑(甲)’의 위치에 있는 회사 임직원들이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형태의 비리는 여전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다만 자신들도 ‘부패 고리의 수혜자’인데다 약자이기 때문에 외국기업처럼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고 중소기업인들은 고백한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기업 부패=빌트인 가구를 납품하는 한 중소기업은 최근 상대편 회사의 구매 담당임원에게서 기상천외한 요구를 받고 혀를 내둘렀다. “매년 주택담보 대출을 2000만원씩 받을 테니 그 돈을 대신 갚으라”는 것.

최근 중소기업인 모임에서는 “내부 감사가 깐깐하기로 소문난 대기업 A사가 좀 달라졌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술이나 골프접대는 물론 1인당 식사비용이 5만원이 넘는 접대도 금지하는 A사의 일부 임직원이 “외국에 개설한 계좌로 납품금액의 1%를 송금하라”고 말한다는 것.

벤처기업의 납품이 많은 정보통신업계에서는 납품 회사의 주식을 뇌물로 요구하는 사례가 많다.

네트워크 장비용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유모 상무(37)는 “외부에 알려지기 쉬운 부패 관행은 줄어들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약화돼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크게 챙겨야 한다는 인식들이 퍼지면서 뇌물을 받는 수법이 교묘해지고 액수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내부 비리와의 전쟁=중소기업의 이런 호소를 어떤 식으로든 접하면서 윤리경영의 강도를 더 높이는 대기업도 적지 않다.

신세계는 내부 비리를 감시하고 제보를 받아 추적하는 전담직원 7명을 두고 있다. 바이어 한 명이 납품 관련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구매 시스템도 바꾸었다.

LG전자는 임직원들이 협력회사의 주식을 아예 소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직원에게 뇌물공세를 펼친 유명 코스닥기업과 거래를 끊고 이 회사 직원들의 삼성전자 출입을 금지시켰다. 윤리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직원들과 협력업체들에 알리기 위한 것.

휴대전화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름이 꽤 알려진 젊은 벤처기업인들도 제품경쟁력보다는 정치권, 고위 관료, 오너를 등에 업고 거래를 트려는 것이 현실”이라며 “중소기업인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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