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5월 17일 18시 0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특히 대통령 탄핵안 기각으로 정치 불안 요인이 크게 줄었지만 주가와 환율 등 금융지표는 더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7일 본보가 마련한 ‘30대 증권전문가들의 한국경제 난상토론’에서 참석자들은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위기국면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라며 “노무현 정부가 경제의 큰 흐름을 잡고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성장이냐, 분배냐’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지금은 한국의 성장 동력을 육성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할 때라는 게 젊은 증권전문가들의 경제난 해법이다.
이 자리에는 한화증권 홍춘욱 투자전략팀장(35), 대우증권 정창원 반도체팀장(35), 굿모닝신한증권 김학균 스트래티지스트(34), 동원증권 고유선 이코노미스트(33)와 이정 전기전자담당 애널리스트(32)등 5명이 참석했다.》
▽사회=주가가 폭락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김학균=한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생각이다. 주가가 오를 당시 경제가 과연 좋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명목 지표는 개선됐지만 소수의 기업만 돈을 버는 양극화 구도였다. 내수도 계속 안 좋았다. 한국 증시의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고점이 낮아지는 게 가장 염려스러운 대목이다.
▽정창원=경제 위기를 지나치게 조장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미래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삼성전자 등 소수 기업은 잘나갔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 사정은 엉망이었다. 지난해 상위 20개 기업의 설비 투자는 전년보다 늘었지만 전체 기업으로 보면 오히려 줄었다. 올해도 역시 삼성전자 등 상위 몇 개 기업만 잘나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현재보다 앞으로 5∼10년 뒤가 더 걱정스럽다.
▽이정=벤처기업들 탐방을 다녀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진다는 점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잘나간다는 휴대전화 부품업체들이 모인 경북 구미도 지역 경제는 엉망이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에 무리한 납품 단계를 요구한다는 불만도 높다. 심지어 한국 대기업과 거래를 끊고 대만과 중국 업체로 돌아선 부품업체도 있다.
▽고유선=사실 중국의 경기과열은 조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나 원자재 가격 상승도 경기가 좋아지는 신호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나 유가 움직임이 예측 범위를 벗어났다. 한국은 유가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여서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관건은 유가가 3·4분기(7∼9월) 이후 안정을 되찾을지 여부다. 아시아의 정치적 리스크가 높아지는 점도 우려된다.
▽사회=노무현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한 뒤 밝힌 경제정책이 이른바 ‘개혁’ 쪽에 쏠린다는 평가다. 이는 기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개혁 의지가 있는 정부니까 분배 정책이 우선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분배와 성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부의 분배가 왜곡된 사회에서는 성장이 어렵다. 하지만 정책 방향을 분배 쪽으로 못 박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상황을 봐 가면서 조절해야 할 문제다.
▽홍춘욱=개혁 성향이 짙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탄핵 기각 결정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다.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거 정부가 그랬듯이 전통적인 친기업정책을 쓰되 감세, 특별소비세 인하, 추경예산 편성 등 내수를 키우며 성장논리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가운데 1970년대식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펼쳐질 가능성도 크다.
▽정=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한다는 정부 정책은 오해되는 부분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정부의 환율 정책은 친기업적인 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한국은 달러 약세기조에서 가장 열심히 환율 방어에 나선 나라다. 수입제품의 가격 하락 등으로 서민들이 얻게 될 이익을 희생해서 기업을 도와줬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홍=현 정부는 빚더미에서 나라를 물려받았다. SK글로벌 사태와 신용카드 위기 등의 악재 ‘설거지’만 하느라 집권 후 1년간 새로운 대안을 내놓을 정신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과거 정부도 잘못이 있다. 내수를 부양한답시고 가장 신중하게 다뤄야 할 부동산과 카드부문을 풀어버린 것 아니냐.
▽사회=대내외 경제상황이 현 상태대로 유지될 경우 앞으로 한국경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김=정부의 경제정책은 여러 부담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수준이지 ‘잘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등은 모두 과거가 배경이다. 열린우리당이 탄핵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것이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인기몰이를 한 것도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이런 식의 인기몰이로 해서는 안 된다. 대중은 무능한 정부보다 ‘사악해도 유능한 정부’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경제가 더 악화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딱 떨어지는 ‘비즈니스 모델’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보기술(IT), 벤처 육성책 등을 나름대로 사회 어젠다로 설정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내세울 게 없다. 그러다보니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기업 이익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문제다. ‘80 대 20’의 사회가 아니라 ‘90 대 10’의 사회로 가고 있다.
▽고=한국경제는 외생 변수가 너무 많이 작용하는 구조다. 태생적인 구조라서 바꾸기는 쉽지 않다. 이를 뛰어넘을 만큼 내부 경제 동력이 축적된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경제의 큰 흐름을 잡거나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아직은 그런 질적인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참여정부의 집권 2기가 시작된다. 한국경제가 다시 뛰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한국경제는 방향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성장과 분배 등 여러 가치가 섞여 있는 상황이다. 10년 뒤에 우리의 성장 동력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많은 중소기업도 고민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조차 플래시메모리 이후의 사업모델을 찾느라 고심하는 것으로 안다.
▽정=그래도 우리는 2010년까지 IT로 버틸 수는 있다고 본다. 이후가 문제다. 미국은 생명공학기술(BT) 분야에 승부를 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무리 IT 제품을 많이 팔아봤자 미국인이 500만원짜리 대머리 치료제, 5000만원짜리 암 치료제 등을 팔면 경쟁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뭘 이루겠다고 하다가는 다 망한다. 10년 뒤를 보고 하나하나 정책을 마련해줬으면 한다. 기술 개발과 이공계 지원 등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나도 이공계 출신이지만 먹고 살려고 증권업계로 왔다.(웃음)
▽홍=동의한다. 명문대 이공계에 진학한 조카가 졸업 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의대로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가 과학기술에 달려 있다며 이공계 진학을 권유했던 내가 미안할 정도다.
▽김=요즘 사회에서 논의되는 것들이 너무 거대 담론이다. 각론이 없다. 각종 현안에 대해 정부가 분명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 일관된 정책을 펼쳐야 실패를 하더라도 후대 사람들이 배우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잃어버린 5년이란 말을 듣지 않는다.
▽홍=일단은 지금 갖고 있는 역량을 잘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커지는 중국과 인도 시장에 한국경제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중국과 인도의 중산층이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를 잘 찾아내야 한다. 그 무기는 결국 인재 육성이다.
▽정=이제 한국사회는 교육과 금융, 기업부문에서 지나치게 분배에 초점을 맞추면 안되는 분기점에 와 있다.
정리=박 용기자 parky@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