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2003]충북 음성군 석산사과농장

  • 입력 2003년 8월 28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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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충북 음성군 석산농장의 주인 손근목씨가 비가 오는 가운데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추석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일조량이 부족해 대부분의 사과는 색깔이 푸르다. 박형준기자
27일 충북 음성군 석산농장의 주인 손근목씨가 비가 오는 가운데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추석이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일조량이 부족해 대부분의 사과는 색깔이 푸르다. 박형준기자
또 비가 왔다. 27일 충북 음성군 소이면 석산농장 내 사과밭 1만5000평은 굵은 빗방울에 흠뻑 젖었다. 예정대로라면 27일은 현대백화점에 납품할 사과를 따야 했다. 하지만 조세규 현대백화점 식품팀 차장은 작업을 중지시켰다. 사과 수확을 늦춰 하루라도 더 햇빛을 쪼이게 하기 위해서다.

“30년 동안 사과농장을 했지만 올해가 최악이에요.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오니 사과가 익을 수 있겠어요? 벌레는 또 어찌나 많이 생기는지….”

비옷을 입고 가지치기를 하던 농장주 손근목씨(52)가 처음 내뱉은 말이다. 손씨는 “한 달 정도 햇빛 양이 부족하다보니 사과 색깔이 아직 푸릇푸릇하다”며 “사과에 빨간색 페인트칠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왠지 이상했다. 기자의 눈에는 3000여평의 홍로 사과밭은 더없이 훌륭해 보였다. 사과가 발갛게 잘 익었을 뿐 아니라 크기도 굵직굵직했다.

기자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손씨가 기자를 사과밭 안쪽으로 끌고 갔다. “보세요,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제대로 자란 게 없을 거예요. 햇빛 잘 드는 입구쪽만 사과가 크고 발갛게 익었습니다.”

정말 그랬다. 전체 사과밭은 붉은 빛이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사과가 푸릇푸릇하고 크기도 작았다.

“지난주에는 극약처방을 했습니다. 나무를 죽일 수도 있지만 밑동을 칼로 그었어요. 이렇게 비가 자주 내리면 영양분 공급을 줄여야 합니다.”

사과밭에는 거름이 듬뿍 뿌려져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영양분만 공급하면 기형사과가 나온단다. 결국 뿌리에서 흡수한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도록 나무 밑동을 칼로 흠집을 낸 것. 사과밭을 한 바퀴 둘러본 조 차장은 “올해 이 정도 사과농사를 지었으면 아주 잘한 편”이라며 “약 30%는 백화점 매장에다 진열할 수 있겠지만 특품으로 치는 500g 이상짜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석산농장이 현대백화점과 거래해 온 것은 올해로 3년째. 지난해만 해도 50% 이상이 백화점용으로 나갔다. 굵기도 어른 주먹을 2개 합친 것보다 큰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올해는 대부분 사과를 공판장에 넘겨야 할 판이다.

사과농사가 엉망이다 보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사과 가격이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물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헐값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하품(下品)들은 지난해보다 크기가 작고 당도(糖度)도 형편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 기준으로 무게 375g 이상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사과1호 선물세트는 지난해보다 40% 정도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공판장을 통해 거래되는 중품 및 하품 가격은 지난해보다 더 싼 수준. 그렇다면 올해 대부분 사과 농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한 5일만 햇빛이 쨍쨍하게 났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크는 것은 글렀지만 색깔이라도 완전히 밸 수 있도록 말이죠.”

하늘은 무심하게도 30년 사과농사를 해온 농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주말에 또다시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한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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