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약산업의 현주소]"생명공학 연구인력-투자 부족"

  • 입력 2003년 5월 12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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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생명과학이 개발한 항균제 팩티브(Factive)가 최근 국내 신약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공식 승인을 받으면서 국내 신약 산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LG생명과학은 추가로 2, 3개의 신약 승인을 준비 중이다. 다른 대기업 및 바이오벤처들도 이 부문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바이오기업인 노바티스(스위스 본사) 한국지사장 프랑크 보베는 3년간의 국내 경험을 통해 “한국이 성패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강조했다. LG생명과학 양흥준(楊興準) 사장도 “한국 바이오산업에 거품이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신약 산업의 첨단에 선 두 사장이 최근 서울 여의도 LG생명과학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얘기는 ‘팩티브’ 성공을 축하하는 덕담으로 시작됐다.

▽양흥준 사장=한국의 제약사들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고유의 기술로 선진국에서 승인받은 의약품을 개발한 예가 없었다. ‘팩티브’는 한국 신약 산업의 첫 걸음이 된 셈이다.

▽프랑크 보베 사장=‘기회의 문’은 지금 열려 있다. 하지만 곧 닫힐 것이다. 바로 지금이 한국 정부와 제약사들이 자체 신약 개발에 나설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갈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할 중요한 시기다.

▽양=한국의 바이오산업은 매우 부풀려져 있다. 또 정부가 바이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이미 30∼40년 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한국에서는 2, 3년 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그저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다.

▽보베=한국 바이오산업을 둘러본 노바티스 본사의 폴 헤를링 박사는 한국에 연구실을 채울 충분한 생화학자들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미국에는 훌륭한 한국인 생화학자들이 많다. 많은 한국 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국립보건원(NIH)이나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경기가 안 좋아진 틈을 타 매력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면서 중국 화학자들을 스카우트해 오고 있다.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투자, 인센티브 못지않게 탄탄한 학문적 기반에 대한 선택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신속한 결정을 내릴지 여부다. 기회의 문이 지금은 열려 있지만, 영원히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양=정부의 이해력이 부족한 것 같다. 한국은 철강, 반도체 등 하드웨어 산업에서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지식기반 산업은 크게 다르다. 지식기반 산업은 긴 시간이 소요되며 투자할 분야 혹은 목표물을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떤 것을 연구개발할 것인가를 찾아내고 결정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생명공학 산업에서는 하드웨어 산업보다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보베=노바티스는 연구개발(R&D) 투자를 매우 중요시한다. 지난해만 해도 회사 전체 매출액 대비 13%를 R&D 투자로 활용했다. 이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투자다. 아시아에서만 해도 올 초 싱가포르에 1500억원을 들여 ‘노바티스 열대질환 연구소’를 열었다. 이 연구소 설립을 유치함으로써 싱가포르 정부는 외국 자본뿐만 아니라 지식(훌륭한 과학자들)까지도 얻게 된 셈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소위 ‘슈퍼 장관(super minister)’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원화된 창구를 갖췄다. 외국 투자사들이 원하는 사항 및 기타 정보를 듣고 해당되는 각 부처에 전달, 의견을 조율해 일을 성사시킨다.

역으로 한국에서는 투자 절차가 매우 힘들다. 투자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과학기술부 보건복지부 외교통상부 등을 쭉 돌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각 부처 상호간의 대화 및 정보교환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우리는 한국 바이오시장에 매우 높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누구와 상의하고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양=제약산업의 경우 제조는 5∼10%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제품의 평가로 이뤄져 있다. 제품 평가 과정이 매우 어렵고 또한 가장 중요하다. 하드웨어 산업은 소비자들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약은 많은 이해 관계자들 (의사, 정부 규제 기관, 환자 등)이 얽혀 있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다.

▽보베=약 1만개의 신약 후보 물질 중 단 1개만이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약 1개를 개발하는 데 드는 투자비는 통상 8억달러 정도이다. 이를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다. 따라서 많은 회사들이 공동 연구를 통해 임상 개발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과 다국적 기업이 이렇게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만나서 공동협력 및 장기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를 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시간을 규정과 규제 등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우리도 노바티스와 같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과 협력하여 일할 기회를 찾고 있다. 한국의 장점은 이제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생명공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의욕도 또 다른 장점이다.

▽보베=추가로 요구되는 것은 다국적 제약사들이 한국 기업과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도다. 싱가포르처럼 세금 혜택은 물론이고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신약 등록 과정을 겪고 난 후에 한 차원 더 나아가 한국 제약사와 공동 연구를 모색하려는 의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한국이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필요한 것은 정부 창구의 일원화다. 정부 부처간의 이해 및 동의를 구하는 데 필요한 서류 및 절차만도 산더미처럼 많고 복잡하다.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한국 신약개발은 ▼

인간 게놈(genom·생명 현상에 꼭 필요한 1쌍의 염색체)의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바이오산업이 차세대 첨단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1980년대 ‘유전 공학’의 맥을 잇는 바이오테크놀로지(BT)는 생명 현상을 이용하는 다양한 기술을 가리킨다. 특히 생물 유전체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 활용하는 게노믹스가 그 핵심.

이를 활용한 바이오산업은 의약품 개발, 진단과 치료, 농업, 환경, 정보기술(IT)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지만 그 가운데서도 의약품이 바이오산업 시장의 80∼9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해지는 신약개발 방법=신약에는 신물질 신약, 생명공학 신약, 천연물 신약 등이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비롯해 선진국들은 그동안 화학적 합성을 통해 새로운 물질을 개발했을 때만 신약으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유전자를 이용한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생명공학적 기법에 의한 신약이 추가됐고, 원래 자연에 있는 물질을 화학적으로 가공하고 임상시험을 거친 것도 신약으로 인정(천연물 신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LG생명과학이 이번에 개발한 팩티브가 신물질 합성에 의한 신약이라면, 미국 암젠사의 빈혈 치료제 EPO는 단백질 재조합이라는 생명공학 기법을 사용한 신약이다.

이는 원래 사람의 몸속에 있는 것이지만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관련 유전자를 대장균이나 다른 동물에서 배양, 다량으로 생산해 약으로 쓰는 것. 작은 바이오 벤처기업이었던 암젠은 현재 EPO 하나로 연간 40억달러를 벌어들일 정도의 대기업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BT를 이용하면 생명공학 신약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신약개발 과정 전반이 혁명적으로 변할 것으로 본다.

가령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예전에는 그동안의 실험 결과들을 바탕으로 수백만 가지의 물질을 조합 실험해봐야 했다. 그러나 BT를 이용하면 관련 유전자와 단백질을 연구해 질병의 메커니즘을 밝힐 수 있으므로 효율성이 질적으로 높아진다.

▽한국도 ‘신약 대국’ 가능성 있다=한국은 1897년 동화약품공업이 설립된 이후 근대적(서양식) 제약회사의 역사가 106년에 이르지만 최근까지 자체적으로 개발한 신약을 갖지 못했다. 1999년 SK가 개발한 선플라가 국내 최초의 신약이었으며 올해 4월초 LG생명과학의 팩티브가 처음 미국 FDA 승인을 받아 해외에서도 판매할 수 있는 신약으로 등록됐다.

한국 제약회사들은 그동안 해외에서 개발한 신약의 특허 기간이 끝나면 이를 모방한 제품들(제너릭)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나 한국 시장이 개방되면서 다국적 제약사들이 직접 한국에 진출하는 바람에 국내 제약사들의 갈 곳이 없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 제약 산업의 활로는 ‘신약 개발’이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으며 BT 발전과 함께 대기업들이 진출, 활기를 띠고 있다.

국내 최초의 신약 선플라를 개발한 이화여대 약학과 김대기 교수(인투젠 대표)는 “서양의 신약 개발 역사가 100년이 넘는 데 반해 한국은 불과 20년 만에 많은 신약을 개발했다”면서 “한국 신약 개발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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