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공동화 어디까지]고비용-규제피해 '해외로…'

  • 입력 2002년 12월 11일 18시 02분


“인천 남동공단에 공장 하나를 지을 돈이면 중국에서 같은 규모의 공장 10개를 지을 수 있다.”

인천 남동산업단지 71블록에 있는 베어링 전문 제작업체 루보. 이 회사는 국내 공장 확장을 포기하고 작년 11월 중국 칭다오(靑島)에 생산공장을 세웠다. 2005년까지 추가로 500만달러를 투자해 15% 정도인 중국 생산비중을 70%까지 끌어올릴 계획.

이 회사 노철수(盧喆秀) 전무는 “중국에서는 생산원가가 국내의 50%, 인건비는 10%에 불과한데 누가 한국에 공장을 짓겠느냐”고 반문했다.

국내 제조업체들의 ‘탈(脫) 한국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고(高)비용-다(多)규제의 열악한 기업환경과 중국 등의 거센 추격의 틈새에 끼여 제조업의 해외 이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제조업 공동화로 인한 성장잠재력 저하, 경기 침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핵심시설도 옮긴다〓제조업체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이 단순 조립라인이나 저가품 생산에서 연구개발(R&D) 디자인 등 핵심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LG전자는 10일 중국 베이징(北京)에 GSM 단말기, 정보가전 등 핵심사업 부문을 연구할 종합 R&D센터를 설립했다. 2005년까지 중국을 글로벌 R&D센터의 중심지로 육성한다는 전략.

2010년 ‘중국 SK그룹 건설’을 표방한 SK는 지난달 상하이(上海)에 생명공학연구소를 세웠다. 삼성전자도 작년 중국에 전자제품연구소와 판매본부를 세운 데 이어 올해 톈진(天津)에 디자인센터를 구축했다.

세계 1위 텐트업체인 지누스의 경우 서울 본사에서 맡고 있던 연구개발 디자인 마케팅 등 핵심사업 부문을 모두 중국으로 옮겼다. 개발에서 생산에 이르는 전 공정을 중국에서 소화하지 않으면 1위 수성이 불가능하기 때문.

한국산업단지공단이 1만2000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1%의 기업이 생산거점을 이미 해외로 옮겼고 11%는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해외 이전 대상으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라인(30.5%)과 R&D(20%) 등 핵심 부문을 꼽았다. 반면 단순 조립공정 및 저가품 생산라인 이전은 10.5%에 그쳤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전자 철강 등 우리의 주력산업도 안전지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기업하기 ‘불편’한 나라〓최근 대중국 투자 확대를 결정한 한 대기업 고위임원인 K씨는 “최소한 경제분야에선 중국은 자본주의,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꼬집었다. 중국 정부가 외국기업들이 투자하기에 편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상하이 푸둥(浦東)신구의 다이후이싱(戴惠興) 대외관계주임은 “‘작은 정부, 큰 서비스’의 정신으로 외국 투자기업을 유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례로 중국 내 다른 성(省)에선 법인세가 25%이지만 푸둥신구는 15%에 불과하다고 소개했다.

반면 한국은 임금도 비싸고 규제도 심해 외국기업은 물론 토종기업마저 기업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특히 중소기업 생산직의 심각한 인력난은 극한 상황까지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중소기업청은 최근 인력난 실태조사에서 중소제조업의 평균 인력부족률이 9.41%로 총 부족인원은 20만명을 웃돈다고 밝혔다.

한 세탁기 부품업체의 임원은 “주5일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면 토요일 특근 때 평일 임금의 150%를 줘야 한다. 이래선 기업을 할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에 비해 △체감금리는 평균 2%포인트 △법인세율은 3.2%포인트 △임금수준은 8배 △공장분양가는 4배 △물류비는 1.9배나 높았다.

공장설립시 필요한 서류도 한국은 34.6개로 중국(18.2개)에 비해 2배 가까이 많았다.

전경련 신종익(申鍾益) 상무는 “대결양상의 노사문화, 반(反)기업적인 정서, 고비용-다규제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의 기업환경이 외국기업은 물론 토종기업까지 내쫓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공동화, 불가피하지만〓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도 경제가 성장하면서 제조업 공동화의 과정을 거쳤다. 고비용 구조와 개발도상국의 추격이라는 틈새에 끼이면 ‘저가생산품을 포기하고 부가가치 높은 분야로 생산자원을 이동하는’ 공동화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신발 섬유 등 일부 업종에선 이미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 수준에 도달하는 2007년에 공동화가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규제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해외 이전이 빠르게 진척될 경우 국내 산업기반이 송두리째 뽑힐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투자 확대→공장 폐쇄와 지역경제 악화→고용불안 및 실업 증가→국제수지 악화 및 환율 평가절하 등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李地平) 연구위원은 “투자수익을 건질 만한 분야가 국내에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며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척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공동화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강운기자kwoon90@donga.com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최호원기자bestiger@donga.com▼해결책은 무엇▼

국내 제조업 공동화는 국내 제조업체들의 ‘탈(脫) 한국’과 외국인 제조업체의 국내 투자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기 때문으로 요약된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업계, 전문가들은 이 두 가지 방향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산업자원부가 내년 6월까지 산업연구원(KIET) 연구 용역결과를 토대로 마련할 ‘산업 집적지(클러스터)’ 조성 방안은 두 가지를 모두 겨냥한 것. 생산과 연구, 금융기반을 함께 마련함으로써 국내기업은 물론 외국기업들도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김종갑(金鍾甲) 산업정책국장은 “서구 외국기업이 중국으로 가는 이유는 싼 임금과 넓은 시장, 또 최근에는 연구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공장 터만 마련해 놓아서는 매력을 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기능이 복합된 클러스터는 외국기업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또 클러스터를 조성하면 또 규모가 작은 국내기업들이 모여 사실상 덩치를 키우고 효율을 높여 경쟁력을 갖춤으로써 외국으로 나갈 필요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정부와 관련 업계가 올해 협회를 발족시키는 등 ‘전자제품 전문생산기업(EMS·Electronics Manufacturing Service)’ 체제 구축을 위해 나서는 것도 국내 제조업의 활성화를 위한 것. 전자부품연구원 이상일(李相日) 벤처사업지원팀장은 “일본 대기업 중에는 일본 내 협력업체보다는 한국 내 업체들에 생산을 맡기려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며 “국내에서 EMS 업체가 성숙하면 밖으로 나가려는 일본 제조업체를 끌어들여 국내 제조업을 부흥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IET 김용렬(金龍烈) 기업정책실장은 “노동문제 처리에서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등 획기적인 투자 유인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일본의 교훈▼

일본 경제는 엔화가치 강세로 고비용 구조가 심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의 공동화가 서서히 진행된 것으로 분석된다.

사실 일본의 제조업은 90년대 거품 붕괴 이후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경제를 그나마 지탱해온 버팀목.

하지만 10년 이상 지속된 금융부실로 전반적인 경제 활력이 떨어진 가운데 중국의 급부상으로 제조업이 쇠퇴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한 일본 마쓰시타전기가 2001년 1·4분기 결산에서 사상 처음으로 영업적자로 반전한 것은 일본 제조업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면서 “일본은 제조업에 의지해 무역수지 흑자를 근근이 유지하고 있지만 비제조업 부문의 낙후로 장기적인 불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제조업의 공동화 양상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가전 부문’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올해 중국제 가전제품이 일본 상륙에 성공하면서 일본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엔고로 국제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진 일본 가전업계는 90년대 초반부터 해외로 생산기지를 앞다퉈 이전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일컫는 90년대 일본 가전메이커는 오로지 제조 거점을 해외로 이전해 명맥을 유지한 셈이다.

그런 일본 가전업계도 최근엔 제조 부문뿐만 아니라 개발 설계 부문까지 인건비가 싼 아시아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다.

예컨대 마쓰시타가 말레이시아에 세탁기 등 일반 가전제품의 기획 개발 설계 부문까지 옮겼다. 산요전기는 채산성이 별로 없는 저가의 가전사업을 축소하는 대신 이를 중국제 가전 브랜드로 대체하고 있다.

적어도 일본의 중저가 가전제품의 브랜드는 ‘일본’이지만 기획 개발 설계 제조는 대부분 아시아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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