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4900억 의혹덮기' 급급

  • 입력 2002년 10월 8일 18시 49분


한국 사회를 뒤흔들어놓고 있는 현대상선의 4900억원 부당대출 및 대북(對北) 송금의혹과 관련해 정부 태도가 석연치 않다는 비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는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은 채 ‘덮어두기’와 설득력 약한 강변(强辯)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상선이 현지법인을 통해 외화를 빼돌렸다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현대상선 현대종합상사 현대아산의 계열사간 내부거래에서 매출액이 누락된 사실이 밝혀지는 등 파문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정부, ‘계좌추적도 부당내부거래 조사도 못 하겠다’〓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국회 업무보고에서 “내부거래공시 이행실태 점검 등을 통해 부당내부거래 징후가 있으면 철저히 조사해 시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공정위가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의 당좌대월을 받은 사실을 숨긴 것과 현대건설의 기업어음(CP)을 1000억원어치 사들인 데 대한 조사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국회 업무보고 내용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했다.

현대상선이 당좌대월이란 급전(急錢)을 빌려 이것을 다시 계열사에 지원하는 비상식적인 거래에 대해서도 “유리한 조건으로 사주지만 않았으면 조사대상이 아니다”는 궤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공정위의 이런 방침은 그동안 정부 고위당국자들이 “현대상선 대출금은 대북(對北) 송금용이 아니라 계열사 지원용”이라고 주장해온 점과도 앞뒤가 안 맞는다.

국책은행인 산은에서 무려 49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 현대상선으로 들어가 다른 현대 계열사로 흘러갔다면 당연히 부당내부거래 조사 대상이 된다. 더구나 조사과정에서 만약 대북 지원과 무관한 현대 계열사간 거래란 사실이 입증된다면 정부로서는 최소한 ‘대북 송금용 대출’이란 의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정부가 이런 의미를 내포하는 부당내부거래 조사 및 계좌추적을 기피한다는 것은 무언가 감추려는 데가 있지 않고는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이다.

▽현지법인은 통상적인 해외밀반출 통로〓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외화를 해외로 빼돌릴 때는 해외현지법인이나 종합상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 대출금 4900억원을 북한에 보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해외현지법인이나 계열사와의 거래명세를 보면 의심 가는 부분이 많다.

현대상선은 미국 유럽 일본 아시아 지역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해외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현지법인이 운반계약을 따내면 서울 본사는 현지법인에 영업수수료를 지급하고 이를 매입으로 잡는다.

현대상선의 2000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해외현지법인에 대한 매입액은 1316억원이며 채무잔액은 98억원이다. 차액인 1218억원이 현지법인에 수수료 명목으로 송금된 것. 2001년에도 매입액 1375억원, 채무잔액 218억원으로 1157억원이 송금됐다.

이상한 것은 99년 감사보고서에는 이같은 현지법인과의 매입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 거래규모가 가장 큰 미국 현지법인은 82년에 설립됐을 정도로 현대상선은 오랫동안 해외영업을 해왔는데 99년까지는 왜 이러한 기록이 없었는지 의문이다.

또 현대상선의 2000년 연결감사보고서에는 미국 현지법인 매입액이 1486억원으로 적혀 있어 현대상선 단독보고서와 913억원이나 차이가 난다.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현대상선의 연간매출규모(40억달러)를 볼 때 수수료 지급액이 연간 1300억원이 될 수는 있지만 99년 이전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회계법인 관계자는 “통상 본사와 해외현지법인은 매출·매입거래가 함께 발생하는데 매출은 전혀 없고 매입만 있다는 점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종합상사·아산과의 거래명세〓현대상선과 현대종합상사의 거래에서도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99년 현대상선의 현대종합상사에 대한 매출액은 473억원, 매입액 596억원이었다.

그런데 2000년 매출액은 542억원으로 큰 차이가 없지만 매입액은 1353억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2001년에도 매출액은 270억원이지만 매입액은 1668억원으로 급증했다.

즉 2000년부터 현대상선에서 현대종합상사로 돈이 많이 송금됐다는 것. 만약 현대상선이 북한으로 돈을 보냈다면 이처럼 해외현지법인과 종합상사를 통해 자금을 세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현대상선 보고서에는 현대아산과의 매입액이 2000년 549억원으로 돼 있으나 현대아산 보고서에는 현대상선과의 매출액이 660억원으로 기록돼 있어 100억원 이상 차이가 난다. 둘 가운데 한 회사의 재무제표는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김광현기자 kkh@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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