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후계갈등 파장]"皇帝경영 여전" 국가신뢰도 흠집

  • 입력 2000년 3월 27일 20시 12분


현대그룹 내분사태는 한국 재벌의 치부를 대내외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룹임직원과 투자자는 물론 국민경제에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요 원인중 하나인 ‘재벌총수의 전횡’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정부가 입버릇처럼 자랑해 온 재벌 구조조정 작업의 성과가 실속없었음을 확인해 줌으로써 우리경제의 대외신인도 회복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매출액 규모만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는 현대그룹의 위상실추는 어떤 형태로든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과 경상수지 등 주요 거시지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경제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재벌의 소유지배구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여 경영의 투명성과 함께 전문경영인체제를 확실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의 신뢰도 하락과 현대그룹의 경쟁력 약화〓재정경제부 고위관계자는 “현대 등 재벌그룹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드러났다”며 “현대사태는 두자릿수 성장률과 수백억달러의 무역흑자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실토했다.

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모 연구위원은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외자유치를 위해서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추진해왔지만 외국인 투자가들은 현대사태를 통해 재벌오너의 경영권이 오히려 강화됐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앞으로 현대의 전문경영인이나 종업원이 일사불란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되면서 현대그룹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경영권 다툼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아 현대 경영진이 기업경영보다는 ‘왕권싸움’에 신경을 쓸 것이란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사태의 직접적 피해자는 주주와 채권자들. 현대사태로 계열사 주가가 떨어질 경우 주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된다. 또 현대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은 덩달아 신뢰도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재경부 경제정책국 관계자는 “현대사태가 성장과 수출 등 주요지표에 당장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올해 거시경제운용에 상당한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족벌, 황제경영 더 이상 않된다〓한국개발연구원 신인석(辛仁錫)연구위원은 “재벌의 소유지배구조가 정부의 제도개선만으론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전근대적 경영형태를 보이는 기업들은 시장에 의해 자동적으로 퇴출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신연구위원은 “대주주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모든 주주의 이익에 맞는 방향으로 경영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후계자다툼으로 최고경영자 인사가 번복되고 이를 당연시하는 사회분위기도 개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모 연구위원은 “재벌 창업자라 하더라도 지분이 10%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다각화된 주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가족끼리 경영권을 마음대로 주고 받는 식의 경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민주적 의사결정구조의 혁파를 주장했다.재경부 관계자는 “정주영 명예회장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무런 법률적 효력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정 명예회장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한편 전경련 관계자는 “정부가 개별기업의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한다”며 “현행 기업지배구조개선방안을 제대로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에 반대했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정몽헌회장은 누구인가▼

정주영명예회장의 5남으로 조용한 성격에 실무적 문제까지 꿰뚫고 있어 젊을 때부터 아랫사람들이 어려워했다. 이번에 드러났듯이 결정적 순간에 사태를 반전시키는 뚝심도 있다. 형인 정몽구회장에 이어 98년 그룹 공동회장에 오르면서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84년 현대전자 설립을 주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부친의 신임을 받았다. 정명예회장이 방북때마다 꼭 수행시키고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을 전적으로 맡길 정도. 정명예회장은 91년 출간한 ‘신용은 현금처럼 분배할 수 없다’라는 책에서 그를 ‘성격이 찬찬한 애’라고 표현했다.

92년 부친의 대선출마 여파로 현대상선 비자금 조성사건 책임을 지고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대상선 현영원(玄永源)고문이 장인.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75년 현대중공업 사원으로 현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81년 현대상선 사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경영인 수업을 쌓기 시작했다. 현재 현대전자와 현대상선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왕발’. 형제 중에는 바로 아래 동생인 정몽준의원과 사이가 가깝다. 52세.

<권순활기자> shkwon@donga.com

▼"팔자…팔테야" 현대株 15개 종목 약세▼

현대그룹 정몽구-몽헌형제의 경영권 다툼에 대해 주식투자자들은 ‘현대주식 매도공세’로 불편한 심경을 대신했다.

27일 주식시장에서 거래된 22개 현대그룹 계열사 종목 중 15개 종목의 주가가 약세를 면치못한 반면 오른 종목은 현대증권 현대건설 현대상선 울산종금 현대엘리베이터 등 5개종목에 불과했다. 현대자동차는 장중 내내 내림세를 보이다가 겨우 보합세로 장을 마감. 최근 외국인들의 매수세가 몰리면서 삼성전자와 함께 연일 강세를 보이던 현대전자도 이날은 소폭(250원) 하락세로 마감, 상승추세에 제동이 걸렸다.

다만 현대증권의 경우 3월 결산을 앞두고 배당을 노린 투자자들이 몰린데다 최근 복귀한 이익치현대증권회장의 주가부양 가능성에 투자자들의 기대감이 반영되면서 가격제한폭까지 상승, 눈길을 끌었다.

어쨌든 증권업계는 이번 현대그룹 정몽구-몽헌형제의 경영권 다툼이 장기적으로는 그룹 주가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 중장기적 전망을 ‘매수’에서 ‘관망’으로 바꾸는 분위기다. 특히 전문경영인의 경영능력과 투명성을 투자판단 지표로 삼고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이번 현대그룹의 노골적인 경영권 분쟁은 IMF체제 이후 호전되던 국내 재벌에 대한 인식을 다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증권사 투자분석부장은 “최악의 경우 현대그룹은 향후 해외증권 발행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며 “한국 재벌의 파행성이 부각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 신인도에 상처를 입게 됐다”고 지적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이번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은 주가에 마이너스측면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사실 현대그룹 계열사 주가는 실적에 비해 주가가 크게 빠진 과매도상태여서 주가반등의 여지가 높은 상황이었으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장기적 전망이 다시 불투명해졌다는 것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외국인들의 물량축소가 우려된다”며 “장기 상승탄력이 약해짐에 따라 주가상승시 고점매도하는 전략이 유효할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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