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3년전 김정태(金正泰) 동원증권사장(현 주택은행장)은 위탁수수료 인하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수수료를 내려도 회사 손익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넌지시 수수료 인하를 거론하고 나서자 증권사 사장단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수수료 인하는 공멸의 길이다’ ‘얼마나 잘났으면 수수료 문제를 들고나오나’ ‘앞으로 사장단회의에 참석할 생각도 말아라’ 등등.
‘일제 공격’을 당한 김사장은 “사장단 입김이 워낙 세서…”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결국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똑같은 일을 지금은 미래에셋 경영진이 당하고 있다.
▽‘뺑뺑이’에 멍드는 투자자〓“내 주식은 엉망인데 매매는 왜 이리 많아?” 투자자 K씨는 한 달에 한 번 증권사로부터 주식 매매명세서를 받을 때마다 울분을 삭이지 못한다.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는 매매회전율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때쯤 증권사 감사실은 투자자들의 항의 전화로 불통이 되곤 한다.
종목 선정이나 매매타이밍에 자신이 없는 개미투자자들은 증권사 직원에게 통장과 도장을 맡겨 놓고 ‘알아서 투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보통이다.
K씨의 경우 맡긴 1억원이 슬금슬금 줄어들더니 3개월 사이 절반 가까이를 날리고 5000만원만 남게 됐다. 이런 판국에 증권사 직원이 ‘아침에 사서 저녁에 파는’ 단타매매를 즐기면서 수수료만 챙기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 증권사 직원은 고객의 투자 이익보다 수수료가 우선이기 때문에 반복매매(일명 뺑뺑이)를 통해 회전율을 높이곤 한다.
▽고리 떼는 증권사가 약정 부추긴다〓D증권 영업본부장 정모상무는 전화통을 붙잡고 지점장들을 닦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박지점장, 어제 약정이 형편없어. 노는 계좌가 너무 많은 것 아냐?” 호통을 들은 지점장들은 전날 직원 영업 상황을 챙기면서 실적을 체크한다.
“돌리고 싶지 않아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장 내 월급이 수수료에서 떨어지기 때문이죠.” 이 회사 영업부 박모차장은 “회사가 약정 경쟁을 부추긴다”고 하소연한다.
증권사들은 고객에게 받은 수수료 중 20∼30%를 영업직원에게 인센티브로 준다. 지난해 실적이 중간 정도인 증권사 대리급 직원은 연봉 3500만원에 평균 인센티브로 1억원을 받아갔다. 한달 100억원을 약정한 직원은 연간 성과급이 1억8000만원에 달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수수료〓H증권에서 가장 영업을 잘하는 정모대리는 지난해 한 달 평균 2억원의 성과급을 받아 갔다. 성공비결은 초단기매매. 하루 중 한 계좌에서 무려 10번이상 매매하기도 한다. 김모대리의 관리 계좌 금액은 30억원밖에 안되지만 한달 약정 금액은 무려 3000억원. 어떤 때는 관리 계좌에 들어 있는 돈보다 수수료가 더 많이 떨어진다. 배보다 배꼽이 큰 현실에서 고객 돈만 날아가는 셈.
▽이제는 ‘윈윈게임’을〓증권사들이 미래에셋 수준으로 수수료를 내리면 투자자들이 돌려받는 수수료는 얼마나 될까. 1월 약정금액 229조원을 12개월로 곱해 올 한해 증시 약정금액을 2743조원으로 가정할 때 현행 0.45% 위탁수수료와 0.15% 사이버수수료를 적용하면 증권사가 받는 수수료는 7조7604억원.
그러나 미래에셋 수준인 위탁수수료 0.29%, 사이버수수료 0.029%를 적용하면 수수료는 4조4457억원으로 무려 3조3147억원이 줄어든다.
지난해 증권사들은 10조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10년이면 수수료로 100조원을 버는 셈. 수수료를 50% 할인하고 절감분인 50조원이 주식시장에 재투자된다면 주가는 현재보다 절반 이상 더 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수수료 인하가 고객을 살찌우게 하고 궁극적으로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윈윈게임’이라고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