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산업/현주소와 과제]수입의존-영세성 '기형'불러

  • 입력 1999년 9월 27일 18시 44분


부품산업은 흔히 인체의 ‘허리’에 비유된다. 허리가 튼튼해야 몸이 건강하듯이 부품산업이 강해야 산업구조도 견실하다. 우리경제는 허리를 튼튼히 키우지 못해 이상비대해진 머리와 발을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기형적 신체구조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을 철저히 수입에 의존해온 관행, 기술개발 자체가 힘든 영세기업 위주의 구조, ‘부품산업으로는 돈을 못번다’는 자조가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핵심부품 대부분 일제▼

▽‘수박같은’ 기계〓대구의 기계류 제조업체인 D중공업. 이 업체는 대부분 기업들이 반기는 엔고(円高) 때문에 오히려 속을 끓이고 있다. 일제 부품값 비중이 높아 엔고는 수입단가 상승으로 연결되는 탓이다.

D사가 주로 생산하는 기계는 선반과 밀링머신.회사관계자는 선반 기계를 가리키며 “마치 수박같다” 말했다.

껍데기’만 한국산일 뿐 ‘속’은 온통 외제여서 겉과 속이 다른 수박과 똑같다는 얘기다.

선반의 경우 완제품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은 총 1500여개. 이중 1400여개는 국산이다. 숫적으로는 ‘국산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D사관계자는 그러나 “모르는 소리”라며 손을 젓는다.

“선반에 들어가는 3대 핵심부품인 컨트롤러와 볼스크류, 베어링은 모두 일본제 등 수입품입니다.”

‘알맹이 없는 국산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현장이다.

▼휴대폰 국산화 45%선▼

▽화려한 외양의 초라한 뒤안길〓사상최대 특수를 누리고 있는 국내 반도체업계는 몇년전 생산중단이라는 위기에 몰릴 뻔 했다.위기는 반도체용 에폭시수지를 생산하는 일본 스미토모화학 니이하마공장의 폭발사고가 발단. 에폭시수지는 반도체 생산의 마지막 공정에 들어가는 포장용 재료를 만드는 원료로 국내업계는 대부분 스미토모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다행히 사고 복구가 빨라 위기는 면했지만 수백개 부품 중 하나일 뿐인 에폭시수지 때문에 국내업계는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아찔한 경험을 간직하게 됐다.

급성장하고 있는 정보통신산업도 한편에선 ‘모래성 성장’이라는 지적을 듣고 있다. 정보통신산업 부품의 국산화율은 PC 고속전송장치, 기지국 장비, 휴대폰등이 45∼75% 수준. 디지털 TV는 20∼30%에 불과하다. 전화접속모뎀은 말만 국산일 뿐 가격의 90%가량을 외국부품이 차지하고 있다.

정보통신업계의 한 연구원은 “직접 개발하려는 의지가 부족해 주요 부품은 사다쓰는 것을 당연시하는 ‘기술사대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가입자수 2000만명을 넘어선 휴대폰도 마찬가지. 휴대폰 가격의 30∼40%가 외국 부품비용이다.

업계에서조차 “품질이 확인된 외국부품을 가져다 쓰자는 보신주의 경향이 강하다”고 털어놓는다.

▼"조립업체의 밥" 자조▼

▽발목 잡는 영세성〓부품산업 육성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규모의 영세성. 산자부의 의뢰로 부품산업 현황을 파악중인 기계공업진흥회측은 “너무 영세한 업체들이 많아 이렇다 할 통계자료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한숨지었다. 97년말 현재 자동차 전자 기계 부품업체 가운데 종업원 300명 이하 중소기업은 무려 98.7%.

따라서 대형화한 외국 업체들과 싸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가 원천적으로 힘들다. 연구개발투자도 어렵고 고급인력의 고용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덩치 큰 조립업체에 철저하게 종속돼 있다.부품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들은 “우리는 조립업체의 ‘밥’”이라고 자조하곤 한다.

최근 자동차 공업협동조합 회의 때의 일. 부품업계 구조조정을 위한 의견 수렴을 위한 회의였으나 아무도 발언을 하려 들지 않았다. 한 참석자는 “발언내용이 거래하는 대기업 귀에 들어가면 손해본다는 생각 때문에 모두들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고 전했다. 결국 주최측은 “나중에 서면으로 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대기업 직원들이 술값 외상을 부품 납품업체들 앞으로 달아놓는 관행은 이같은 종속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거래관계가 폐쇄적이다보니 독자 기술개발이나 판로 개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명재·홍석민·성동기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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