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그룹이 24일 단행한 대규모 임원감축으로 그룹 내부가 뒤숭숭하다.
이번 인사는 일단 金善弘(김선홍)그룹회장과 朴齊赫(박재혁)기아자동차사장을 중심으로 위기국면을 타개해야 한다는 강력한 내부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룹 내부의 세력싸움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번에 자문역으로 물러난 韓丞濬(한승준)기아자동차부회장과 해임된 李信行(이신행)기산부회장 등은 김회장의 뒤를 노리며 자신의 계보를 형성했던 인물.
특히 한부회장은 기아사태이후 한 때 김회장의 뒤를 이을 경영진으로 거론될 정도로 기아안팎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경기고 서울대법대 출신인 한부회장은 기아경영진중 대외적으로 가장 발이 넓은 인물로 거론됐다.
또 이부회장은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기산부회장직을 겸임할 정도로 입지가 탄탄했다.
대주주가 없는 기아의 특성상 이들이 형성한 계보들은 막강한 힘을 발휘해왔다.
계보에 속해 있는 간부사원과 임원들은 공조직상에 있는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하기보다는 사조직상의 상사에게 먼저 달려갈 정도로 기아의 경영구조는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계보가 다른 임직원들 간에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업무협조도 원활하지 못했다.
또 이번에 물러난 임원 중 상당수는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김회장 퇴임을 조건으로 지원을 거부하자 김회장 퇴임을 주장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직원들은 기아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이같은 계보경영을 들면서 조직의 화합을 깨뜨리는 계보를 해체하고 무능력한 임원들을 해임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정부와 채권은행단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있는 김회장은 기아사태 초기에는 상당한 세력을 쌓은 이들 경영진을 선뜻 손대지 못했다.
이같은 사정으로 기아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임원 35%를 감축하겠다고 지난달말 발표하고도 한달여동안 해임인사를 단행하지 못했다.
기아의 한 임원은 이와 관련, 『해고되면 모두 마찬가지 신세인데 경영진이라고 손에 피를 묻히려 하겠느냐』고 털어놓곤 했다.
계보를 형성하고 있던 임원들에 대해 칼을 빼들지 못했던 김회장이 이날 대규모 임원인사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부장급이하 직원들의 강력한 후원 덕분으로 풀이된다.
이번달 초 발족한 「종업원비상재건대책위원회」(위원장 李伉九·이항구부장)는 수차례 모임을 갖고 『김회장을 중심으로 기아를 재건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김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들은 또 한부회장과 이부회장 등에게 사퇴압력을 가해 이들의 자진사퇴를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회장과 마찰을 빚었던 임원들이 대거 정리되면서 「기아호(號)」는 김회장의 신임을 받는 박재혁사장과 柳永杰(유영걸)기아자동차판매사장 등이 이끌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종업원들로부터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박사장은 노동조합과 김회장의 지지를 등에 업고 기아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기아그룹의 한 임원은 『이제 더이상 기아에는 계보가 존재하지 않게 됐다』며 『김회장과 박사장, 노조를 중심으로 기아재건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이희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