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세계화 구슬땀…『마음의 문 열어야 현지화돼요』

  • 입력 1997년 8월 18일 07시 30분


90년대 우리 기업들의 손꼽히는 화두(話頭)는 「세계화」. 잇따른 시장개방으로 국내시장이 급속히 국제시장으로 흡수되면서 나타난 자연스런 생존법이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동전의 이면인 현지화(現地化)는 말처럼 쉽지 않다. 각양각색의 인종 언어 기후 문화장벽은 초일류기업의 첨단기술과 현란한 마케팅기법으로도 뚫기 어렵다. 특히 문화장벽은 2,3년의 현지 체류기간으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난제중의 난제. 따라서 이를 극복하려는 기업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필리핀의 벽산건설 현지법인인 베코필의 李琁(이선·34)지사장. 지난 95년 첫 부임했을 때 8명의 본사파견 직원과 42명의 현지채용인들은 기름과 물처럼 따로 놀았다. 현재의 즐거움을 미래의 성공과 바꾸지 않으려는 열대 특유의 기질과 「일벌레」로 보이는 한국인들은 서로 마음의 문을 꼭 걸어잠갔던 것. 이지사장은 문득 「신동파」를 모르는 필리핀 사람들이 드물 정도로 농구를 광적으로 즐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마닐라와 케손시티 건설현장에 농구팀을 조직했다. 장비 유니폼 경기장도 제공했다. 매주 금요일 시합땐 선수가족은 물론 지역 주민들까지 가세, 응원전을 벌였다. 물론 경기중엔 한국 필리핀 국적이 따로 없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최상의 팀워크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농구팀을 조직한 지 1년도 안돼 벽산건설은 현지 언론으로부터 성공적인 현지화기업으로 손꼽히게 됐다. 제일제당은 인도네시아 진출 초기 공장내에 5억원을 들여 이슬람사원을 지었다. 국교(國敎)인 이슬람교를 회사내에 수용하지 않고는 영원한 외국기업으로 남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LG화학도 자카르타내 현지 합작회사에 기도시설을 만들었다. 무역업체인 D사의 리비아 지사장은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칼리드 킴」으로 바꿨다. 대우그룹은 스포츠 마케팅과 현지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동안 후원해온 폴란드 프로축구 1부리그 2위팀인 「레기아바르샤바」를 지난해 말 인수, 「레기아대우」로 바꿨다. 우승이란 목표를 향해 한게임 한게임 치르다 보면 축구팬과 대우가 어렵지 않게 「한몸」이 될 것이라는 게 대우측의 의도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지화에 실패하면 곧 참담한 문화적 충격이 이어진다. 80년대 말 아프리카에 파견나온 한 상사원은 현지직원들과의 갈등 끝에 정신이상이 돼 귀국, 끝내 부인을 살해하고 말았다. 최근 「21세기 리더들이여, 문화장벽을 뛰어넘자」는 경험서를 펴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李鍾泰(이종태)홍보실장은 『미국도 해외파견 자국인의 5% 정도는 약물 알코올 등에 중독되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며 『우리 기업인들의 해외파견이 급증하는 만큼 문화적 충격에 따른 후유증도 직업병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내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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